에드가 드가 (Edgar Degas, 1834–1917)
제작 연도 : 1891년경 (Circa 1891)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강렬한 보색의 충돌이다.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르는 무용수의 상체는 타오르는 듯한 오렌지색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의상의 색이 아니다. 방금 전까지 격렬한 회전과 도약을 감내해 낸 근육의 온도, 그 붉은 잔열(殘熱)이다.
반면, 그녀를 감싸고 있는 배경과 튀튀(Tutu)의 하단부는 서늘한 푸른빛과 청록색으로 칠해져 있다. 뜨겁게 달아오른 육체가 무대 뒤편의 차가운 공기와 만나는 순간. 드가는 파스텔이라는 건조한 재료를 문질러 이 온도 차이를 시각화했다. 파스텔 가루가 종이 위에 으깨지며 만들어낸 거친 질감은, 부드러운 살결이 아니라 땀에 젖고 송진 가루가 묻은 노동의 현장을 증언한다.
그림 속 무용수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다. 우리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드가는 잔인하리만큼 철저하게 그녀의 '얼굴'을 지웠다. 대신 그가 조명한 것은 기형적으로 굽어진 등뼈와, 자신의 발목을 움켜쥐려는 듯 뻗은 팔의 각도다.
왜 얼굴을 지웠을까. 이 순간 그녀에게 '자아'는 사치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는 한 명의 여성이 아니라, 춤이라는 목적을 수행하다 고장 난, 그래서 잠시 정비가 필요한 ‘육체라는 기계’로서 존재한다. 그녀가 만지고 있는 것은 발레슈즈의 끈일 수도, 혹은 비명을 지르는 아킬레스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동작이 관객을 향한 우아한 인사가 아니라, 오직 생존을 위한 ‘웅크림’이라는 사실이다. 나비가 날갯짓을 멈추고 땅에 내려앉아, 자신의 다리가 부러졌는지를 확인하는 시간. 그 처절한 중력의 무게가 캔버스 전체를 짓누르고 있다.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빛의 유희와 풍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 드가는 도시의 이면을 파고들었다. 그는 무대 위의 화려함보다 무대 뒤의 헐떡임을 사랑했다. 누군가는 드가의 시선을 '관음증'이라 비판했지만, 나는 이것을 ‘냉정한 연민’이라 부르고 싶다.
그는 무용수들을 예쁘게 포장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노동을 신성시했다. 어깨의 뼈가 튀어나오고, 다리의 근육이 뒤틀리는 그 볼품없는 순간이야말로 예술이 탄생하는 자궁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아름답지 않다. 대신 숭고하다. 화면 오른쪽 구석, 잘려 나간 또 다른 무용수의 신체 일부는 이 고통이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생산해 내는 모든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비극임을 암시한다.
우리는 종종 잊는다. 백조의 우아한 수면 아래 물갈퀴의 필사적인 저어댐이 있다는 것을. 드가의 <두 명의 무용수>는 그 물 밑의 풍경을 끄집어내어 우리 눈앞에 들이민다.
오렌지색 상의를 입은 그녀가 고개를 드는 순간, 그녀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대 위로 뛰어나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중력에 굴복해 웅크리고 있는 저 짧은 휴식은 얼마나 간절하고도 위태로운가. 그림 속 푸른 배경이 유독 깊은 침묵처럼 느껴지는 것은, 곧 다시 시작될 그녀의 검은 노동을 우리가 예감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학적 관점에서 ‘숭고(The Sublime)’는 아름다움(Beauty)과 다릅니다. 아름다움이 조화와 균형, 그리고 쾌감을 준다면, ‘숭고(The Sublime)’는 고통, 두려움, 그리고 압도적인 힘 앞에서 느끼는 전율입니다.
이 관점을 에드가 드가의 <두 명의 무용수>에 적용하면, 이 그림은 더 이상 휴식하는 무용수의 그림이 아닙니다. 육체의 한계상황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을 담은 거대한 서사가 됩니다.
칸트는 ‘숭고’의 시작이 불쾌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그림을 처음 볼 때 느끼는 감정은 편안함이 아닙니다. 그림 속 무용수의 자세를 보십시오. 그녀의 등뼈는 기이하게 굽어 있고, 팔은 뒤로 꺾여 있으며, 고개는 푹 숙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르네상스 미술이 추구하던 인체의 이상적인 비례나 우아한 포즈가 완전히 파괴된 상태입니다. 드가는 관객에게 예쁜 발레리나를 기대하고 온 시선에 고통스러운 육체를 들이밉니다. 우리는 이 뒤틀림에서 본능적인 불편함, 즉 ‘숭고’의 1단계인 물리적 공포를 마주합니다.
‘숭고’는 보통 거대한 폭풍이나 산맥 앞에서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좁은 대기실 그림에서 압도적인 힘은 무엇일까요? 무용수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중력과 발레라는 예술이 요구하는 잔혹한 규율입니다. 인간의 몸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완벽한 동작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짓이겨야 합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예술이라는 절대적 힘 앞에서 무력하게 웅크리고 있습니다.
‘숭고’의 완성은 압도적인 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뎌내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발견할 때 일어납니다. 그녀는 쓰러져 울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발목을 잡고,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이 정적인 순간은 패배가 아니라, 다시 중력을 거스르기 위해 에너지를 응축하는 의지의 시간입니다.
그녀의 등은 굽어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잠시 후 그녀는 저 고통스러운 육체를 이끌고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 기어이 중력을 이겨내고 날아오를 것임을. 육체는 부서질 듯 연약하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고 다시 춤추려는 정신은 그 어떤 거대한 자연보다 위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