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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늘 Oct 30. 2022

동네 뒷산이 세계 명소를 이기는 방법



페루의 북쪽의 작은 고산 마을 와라즈가 유명한 이유는 단 하나다. ‘비니쿤카’ 라는 무지개 색깔의 산. 페루도, 남미도 아니고 지구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명소 13곳에 꼽히는 곳.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면 좋아요 170개 정도는 떼 놓은 당상이다. 저 산에 오르기 위해 여행자들은 수도에서 8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와라즈로 온다. 나도 와라즈로 왔다. 그리고 비니쿤카에 가지 않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고산병 때문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머리가 아팠다. 깨질 듯이 아팠다. 이런 종류의 두통은 처음이었다.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했고 위아래로 모든 것을 쏟아 내 진이 다 빠져버렸다. 새벽 출발인데 어떡하지... 끙끙 앓다 겨우 일어나 같이 가기로 한 친구에게 간식을 챙겨 쥐여주고 떠나보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조금 자고 일어나니 이제 조금 익숙해졌는지 조금 숨 쉬고 걸을 만 하자 일단 좀 나가자 싶었다. 


18층의 아파트에 11층에 살면서 잘 닦인 아스팔트 길을 걷다가 어디를 둘러봐도 이층의 건물이 최대인 어설픈 흙 돌길을 걸었다. 새로운 게 좋다. 출퇴근길도 항상 조금 더 돌아가더라도 새로운 길을 찾는 걸 좋아했다. 집 앞이라도 한 골목이라도 더 가면 여행을 온 것처럼 새로운 기분이 들어 들떴다. 그저 뒷동네만 걸어도 즐겁고 유난히 예쁜 구름을 봤을 때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러다가도 내가 얼마나 하찮은 것에 쉽게 감사와 만족을 느끼는가를 깨달을 때 현실을 깨닫게 된다.


무리를 해서라도 비니쿤카에 갔어야 했나? 열정적이지 못한 스스로 실망감이 밀려왔다. 왜 운동을 미리 하지 않았을까. 왜 이렇게 체력이 약할까. 무슨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와놓고 고산병을 못 이겨서 못 가냐..나는 야망도 승부욕도 강하지 않은 타입이다. 그런 나를 두고 엄마는 항상 안타까워하셨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이 강한 경쟁의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산다는 것은 쉽게 뒤처지는 일이다. 완전한 아싸가 아니더라도 

제법 다른 사람들 눈에는 뒤처지는 일일 거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도 알기에 자신을 다그쳐도 보고 답답해도 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조용한 길을 걸으면서 왁자지껄 올라갈 관광버스 안의 여행자들을 떠올렸다. 경쟁은 괴롭고 이탈은 외롭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에 우울해져서 걷다 보니 동네 뒷산이 나왔다. 산이라고 민망할 정도의 언덕이길래 나는 저기라도 올라가서 동네라도 내려다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 같아 뒷짐을 지고 조금씩 올라갔다. 숨이 살짝 가빠 올 때쯤 평지가 나타났고 아무도 없었는데 넓적한 돌에 혼자 앉아 쉬고 계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코에 뭔가를 끼고 있는 희한한 모습이었는데 가까이 가서 인사를 하면서 보니 코카잎이었다. 코카잎은 마셔도 되고 저렇게 코에 껴도 되는 건지.. 


올라. 부에노스 따르데스.(안녕하세요) 스페인어 배우길 잘했다. 현지인과의 첫 대화. 고작 인사 한마디를 나누고 뿌듯해져서는 할아버지 옆으로 앉았다. 와 - 앉고 보니 그 자리가 명당이더라. 정면으로 건너편 산의 전경이 쫙 펼쳐져 있었다. 부드럽게 펼쳐져 있는 진녹색의 안데스 산맥에 마음이 다 포근해져서 아까의 마음은 다 잊고 멍하니 전경을 음미했다. 좋다 진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옆의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오셨다. 난 인사만 배워 왔는데... ‘나는 라틴어를 못 합니다.’라고 말을 하고 (그 말을 배워 왔다) 앉아 있었는데 못 알아듣던지 말던지 계속 말을 시키시길래 그냥 한국말로 대답했다.


“산에 가려고 했는데요.. 비니쿤카 비니쿤카 네네 비니쿤카. 못 갔어요. 고산병이 심해가지고... 고산 고산 머리 어질어질. 헤대 이크. 우웩 토 하고. 네 힘들어서... 포기했어요. 회사도 막 포기하고... 싸우스 코리아 비행기 2번이나 타고 24시간에다가 버스도 8시간이나 걸려서 왔다니까요...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막상 오니까 엄청 좋은지도 모르겠고... 멋있는데도 못가고 동네 뒷산이나 오고... 뭐 하는 건지...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모르겠네요 진짜... ” 한국말로 막 중얼거리면서 할아버지 얼굴을 보고 손짓·발짓하면서 설명했다가 웅얼거리다가... 한숨을 쉬다가 난리를 치고 있는데 할아버지도 뭐라고 라틴어로 말씀하셨다. 당연히 못 알아들었다. 못 알아듣는다니까요..가만히 있자 할아버지도 가만히 나를 보셨다. 칠흑같이 까만 눈을 갖고 계시네. 할아버지랑 눈이 깊게 마주쳤는데 '괜찮아... 다 상관없어. 잘 왔어. 멋있지?' 그렇게 말하는 거 같았다.


괜히 웃음이 났다. 그 이후에도 할아버지도 당연히 못 알아듣고 나도 할아버지가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들었고 각자 떠들었지만, 분명히 그게 대화였다고 생각한다. 여전히도 할아버지 코에 끼워진 코카잎과 까만 눈이 생각난다.


... 생각해보니까 다른 여행자들도 다 올리는 비니쿤카보다 코에 코카잎을 끼운 할아버지와의 셀카가 더 '좋아요'를 많이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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