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였다…
비가 스산하게 추적이던 어느 늦가을,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눈에 담고 거리를 떠도는 너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네가 되고 말았다. 너를 잠식한 심연에 매혹 돼버린 나의 우매함이 컸던 탓인지, 나의 자유를 뺏고자 한 너의 갈망이 컸던 덕인지 나는 지금 걷고 있고 너는 지금 날고 있다.
나는 너를 대신해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했고 물류창고에서 박스를 날라야 했고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을 먹어야 했고 좁아터진 고시원에서 쪽잠을 자야 했고 지원한 수십 곳의 기업에서도, 7년을 만난 연인에게서도 거부당해야 했다.
이만하면 됐다고, 이 모든 일이 너의 꿈일 뿐이라고, 그러니 어서 너의 꿈을 깨야 한다고, 발악해댈수록 너는 더 높이 날아오를 뿐이다.
팔을 뻗어 날갯죽지를 더듬어본다. 외로운 죽지뼈만 덩그마니 남겨졌다. 창공을 향해 거칠 것 없이 펼쳐 비행하던 날개는 두 손이 되었고 이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의 날개를 훔친 너는 맨들맨들 검은 눈알을 굴리며 머리 위를 맴돌고 있다. 마치 어리석은 나를 조롱하고 있는 듯하다.
계단을 오른다.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해서. 하나, 둘, 셋……오백십팔, 오백십구, 오백이십.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텐데, 그러나 나는 다시 저 하늘을 날아오를 것이다. 마주하고 서서 내 안의 심연으로 너를 빠트릴 것이다. 그러곤 네 모가지를 비틀어 날갯죽지를 찢어발길 것이다.
… 너는, 나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