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엄마와 워킹맘딸의 육아이야기
“아니, 저기 저쪽에 계신 분 때문에 한숨도 못 잤어요! 그렇게 시끄럽게 하면 1인실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들 한숨도 못 자게….”
“죄송합니다. 할머니.. 제가 더 잘 돌볼게요….”
엄마와 나는 참 닮은 것이 많다. 엄마를 참 좋아했던 나는 엄마의 하나하나 다 닮고 싶었다. 뭐 하나 닮은 것이나 비슷한 것이 있으면 좋아했던 나는 안 닮아도 되는 것까지 닮아버렸다.
엄마는 감기 몸살이나 몸 컨디션이 아프면 약을 먹고 주무실 때 끙끙 거리는 편이셨다. 물론, 사람이 아프면 끙끙하며 앓을 수 있지만, 엄마는 조금 그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한동안 엄마가 우울증으로 2년여의 시간을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나 역시 회사를 이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늘 회사에서 일하느라, 또 퇴근하고서는 친구들과 논다고 엄마의 힘들고 외로움을 뒤로한 채 엄마를 집에 혼자 오래 둔 것이 화근이었을지 모른다.
집에 와서도 피곤하다고 유세를 떨면서 엄마가 물어보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 닫고 잠만 자고 아침에 나가버리는 딸이었으니, 참 지금 생각하니 웃음도 나오지 않는 못된 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배가 아프다고 전화가 왔다.
“엄마, 배가 아프면 화장실에 가!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약 먹었어?”
“윤경아, 약 먹었는데 배가 계속 많이 아파..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평소 잘 먹지도 않았던 엄마였기에, 사실 그 당시의 나는 엄마가 저녁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묻지도 않았던 나만 아는 이기적인 딸이었다. 회사 이직한 지 얼마 안돼서 눈치가 보이는데 엄마가 아프다고 하니 화부터 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엄마는 별것도 아닌 것으로 괜히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닌지 혼자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 후에 걸려온 엄마의 전화는 나를 무너지게 했다.
“윤경아, 응급실인데 엄마 맹장인 것 같데…..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을 할 수가 없다고….”
나는 그대로 회사에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아니 병원으로 달려갔다. 사실 회사에다가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나왔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고, 그저 엄마를 살려달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빌었던 것 같다.
'하느님, 예수님, 성모마리아님, 우리 엄마 제발 살려주세요!!! 엄마 아프면 저도 죽어요!!! 제발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
양재역에 있던 회사에서 분당의 병원 응급실까지 고속도로로 20분도 채 안되게 달려왔고, 주차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른 채로 일단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응급실로 들어가면서 눈으로는 엄마부터 찾았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서 나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엄마를 보자마자, 엄마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엄마, 괜찮아? 많이 아팠지!! 내가 정말 미안해... 엄마. 미안해, 흑흑흑..."
“윤경아, 엄마 괜찮은데… 울지 마..
엄마 이제 진통제 맞아서 안 아파. 괜찮아...
그런데 엄마가 맹장이래.. 그런데.. 복막염으로 갈 수도 있다고 선생님이 그러시네..”
"그럼 엄마 빨리 수술을 해야지, 맹장인데 수술을 왜 안 해?"
"그런데, 엄마가 폐가 하나밖에 없고 해서 수술을 하는 게 쉽지 않은가 봐..."
"그게 무슨 소리야??? 수술이 안된다니?"
"응, 엄마가 전신마취를 하면, 다시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데... 그래서 선생님들이 수술 말고 다른 방법이 없나 알아보신대.."
아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엄마는 사실 지병으로 폐가 하나밖에 없어서 남들보다 건강이 많이 좋지 않으셨다. 이 때는 우울증인지 엄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쉽게 하는 맹장수술 전신마취가 엄마에게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고 해서 계속 맹장 수술을 뒤로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병원 선생님들은 각종 항생제를 써가면서 일단 맹장의 염증을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던 중,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를 부분마취로 맹장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셨다.
맹장수술이 부분마취라니,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이다. 아마 그 당시에도 국내 최초의 앉아서 하는 부분마취 맹장수술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수술은 마취약이 엄마가 안정적인 호흡을 하기 위해 흉강막 위쪽으로 올라가지 않도록 엄마가 앉아서 수술을 한다는 것이라 설명해 주셨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정말 생소한 이 수술이 20년 전 수술한 것이니 그때 엄마의 수술은 아마, 하늘에 계신 아빠가 도움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 2일 이상 계셨던 엄마는 기적적으로 빠른 회복을 하셨고, 곧 일반실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부터 엄마의 엄청난 끙끙 소리를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엄마는 통증을 줄여주는 진통제를 먹으면 그 끙끙 소리는 더 커지면서 소리까지 지르게 되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전혀 기억을 못 하고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다소곳한 모습을 보이니 주변 아무도 엄마가 밤새 소리를 질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밤새 끙끙 거리며 때로는 헛소리를 하고 잠꼬대를 할 때마다 나는 밤새도록 엄마 옆에서 등을 쓸어주고, 괜찮다 손 잡아 주고 하며 밤을 새워서 아침이면 나는 비몽사몽이었다.
“아니 저렇게 예쁘고 조용하신 양반이 밤만 되면 그렇게 아프다고 끙끙댄다….”
낮에 엄마를 마주하신 할머니들은 첫날과는 달리 엄마를 안쓰럽게 보셨고, 그다음에는 밤 새 골골 대며 잠 못 자고 낮에도 비몽사몽 하는 나를 더 기특하게 생각하셨다.
"아이고 저 집은 딸내미가 엄마 때문에 고생하네! 그래도 밤마다 엄마 돌본다고 고생이 많아!
여기 와서 이거 과일 좀 먹어!"
그렇게 밤 잠 못 주무신다고 까칠하게 대하셨던 할머니들과의 시간도 점차 정들어 갔다.
엄마를 모두 다 닮고 싶었던 나는, 닮지 않아도 좋았을 엄마의 습관까지 닮아가고 있었다. 바로 엄마의 끙끙 댐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감기 몸살에 걸려서 우리 집 만병통치약인 판피린을 하나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 나는, 여지없이 밤 새 끙끙거렸고, 그런 끙끙거림을 경험해보지 못한 남편은 잠 한숨 자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다. 남편은 예전의 내가 엄마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나에게 왜 끙끙 거리냐고, 아프면 약을 먹고 병원에 가라고 말을 했다.
“아니 아프면 병원에 가! 이렇게 밤새 끙끙하면 옆에서 어떻게 잠을 자나고!”
평소에는 웃고 넘어가겠지만, 내가 아플 때 들으니 이 말처럼 서운한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 내가 예전에 엄마에게 했던 말들이 엄마에게는 얼마나 비수 같았을까. 생각이 들어서, 남편이 밉다기보다 엄마에게 더 미안해졌다.
그리고 몇 년 후, 초콩 이를 낳고 난 후 나는 또 한 번 놀리게 되었다.
나는 초콩이가 하늘에서 엄마가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둘째를 낳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지만 무언의 강요와 압박을 주시는 시댁에서의 스트레스에 남편과 나는 여차하면 둘째 문제로 이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사이가 안좋아졌었다. 그러던 와중에, 더 이상 이 문제로 스트레스받지 마자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고 안 생기면 우리는 초롱이만 키우는 거로 하자고 시댁에도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기적같이 초콩이가 그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와 준 것이다.
남들보다 많은 나이에 자연 임신으로, 모두가 불가능할 거다 이건 기적이다라고 했던 일이었다.
그런 초콩이는 엄마와 같이 닭띠이니 나는 더 엄마가 보내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초콩이가 생겼으니 나는 더더욱 이렇게 믿고 싶었었다.
그런데, 초콩이가 아주 아기 때, 감기에 걸려서 약을 먹고 재우던 중 나는 초콩이를 보고 너무나 놀랐지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작은 얼굴과 그 작은 입으로 어디서 많이 듣던 엄마의 끙끙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끙.. 끙.. 끄…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