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내가 누구지?

<장애인> 뇌경색에 걸린 아빠와 딸의 이야기

by 정겨움


감사하게도 아빠가 생명이 위중했던 시기를 잘 견디어 주신 덕에 중환자실에서 일반 환자 병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여전히 말씀을 못하고, 움직이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아이패드를 들고 병원에 갔다.


-아빠, 이건 이렇게 펜을 잡고 쓰면 되는 거야. 보이지? 혹시 뭐 필요한 것 있어요? 여기에 써봐요. 그럼 내가 알 수 있으니까!


왼손으로 힘겹게 펜을 든 아빠에게 패드를 가까이 갔다 드렸다.


두근. 긴장된 순간.


펜이 사물놀이를 하는 상쇠의 머리처럼 휘휘 돌더니 알 수 없는 원들이 그려졌다.


멍하니 그 장면을 쳐다봤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아빠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서 있는 나 마저…


-아빠. 내 이름이 뭐예요? 내가 누구지?

‘이 민 수’

-이민수가 누구야? 아빠 내 이름 써봐.’


쓰윽, 나를 쳐다보더니

아빠는 귀찮은 듯이 왼손으로 삐뚤삐뚤 쓴다.

‘이 미 수’

-다시, 다시 써봐요!!!

‘이 민 수’


숨겨둔 애인인가 싶었지만 아빠와 법적 소송 중이었던 분의 이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빠는 왼쪽 뇌(언어 기능)에 큰 손상이 있으시기 때문에 새로운 단어로 생각을 전환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똑같은 단어를 계속 쓰셨던 것이다. 컵을 보면서 ‘컵을 달라고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데 옆에서 갑자기 누가 “문 닫아요”라고 하면 “문을 달라고”하는 장애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한없이 눈물만 났다.


‘이대로 영영 아빠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다시는 아빠랑 웃으면서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일까..’


이렇게 막막한 순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헤쳐 나갈까?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벽이 내 코 앞에 있다. 발걸음을 돌려 과거를 향해 걸어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빠와 마지막 통화를 했던 지점? 혼자된 아빠가 싸구려 편의점 빵과 사과 하나로 아침 끼니를 때우는 것을 모른 척했던 지점? 그때 내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지금이 달라졌을까? 시곗바늘을 되돌려 손에 닿는 과거들을 짚어본다.


부질없다. 과거는 아무런 힘이 없다.

‘지금’을 정확히 직시하고 인정해야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오랜 벗이 말했다.


-겨움아, 아버지께서 네가 아닌 다른 이름을 쓰신다고 하더라도 널 기억 못 하시는 것은 아니야.


언어는 기억을 확인시켜주는 도구이지

기억 그 자체가 아니니까.


널 누구보다 깊이 알고 사랑하시지만

단지 조금 아프셔서 기억과 단어가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으실 뿐이니까. 좀 더 많이 사랑해 드리자. 널 보며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께 나도 감사하고 기도할게.



아빠의 언어 표현 능력이 많이 나아진 요즘에도 나는 늘 묻는다. 답은 매번 다르다.


-아빠. 내가 누구지?

-평화 통일.

(한창 뉴스에서 평화통일을 외치던 시기였다.)


-아빠, 내 이름이 뭐지?

-김일성(네에?????)


뭐 어때, 틀리면 100번이고 1000번이고, 다시 알려 드림되지. 이미 아버지의 손길에서 눈빛에서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으니까,


문제없다고~



언어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야.
기억을 확인시켜주는 도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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