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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솔 Dec 08. 2021

그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워홀 일기] 10. 한밤중의 공포

우핑을 처음 알려준 I언니는 도전적이고 열정적이어서 가는 곳마다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I언니를 동경하는 나는 그 발자국을 착실히 따라가곤 했다. 언니는 자주 나를 격려해주었고, 그 격려에 힘입어 나는 가보지 않은 곳으로 힘껏 한 발짝을 내딛을 수 있었다.


I언니에게 들뜬 마음으로 우핑을 가겠다고 말하자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씩씩하게 잘 다녀오라는 말을 건넬 줄 알았던 언니는 걱정 섞인 말투로 안전을 당부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농장을 찾을 땐 한국 여성이 후기를 남긴 곳을 위주로 봐, 함께 생활하는 우퍼들을 조심해, 데이터가 잘 터지는 곳으로 가 등등. 대체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당차게 걸어가는 I언니가 그 길을 걷기까지 얼마나 많은 불안을 헤쳐 갔는지 조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냥 평화로운 아흐멍다리츠에서도 기대하지 않았던 불쾌한 공포는 있었다.



언젠가 쟝미셸과 밥을 먹을 때였다. 가장 좋아하는 채소가 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양손으로 S자 곡선을 그렸다. 그렇게 생긴 과일이 대체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또 한 번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다시 보니 그건 8자에 가까웠고 만연한 웃음을 띤 그의 얼굴로 미루어보아 여자의 몸을 표현하는 듯했다. 이해하니 불쾌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냥 끝까지 못 알아들은 척했다. 그게 대체 뭐죠? 호박인가? 아니면 오이? 이러면서.


한 번은 그가 침대에서 하는 운동을 제일 좋아한다고 농담 삼아 말한 적도 있다. 이번에는 그 운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었으나 짐짓 모른 체했다. 쟝미셸은 내가 프랑스어가 부족한 탓에 그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 줄 알고 열심히 설명했다. 남자랑 여자 둘이서 하는 운동 있잖아, 하다 보면 신음소리도 막 나는… 이건 정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모른 체도 안 통하니 원. 나는 그런 종류의 농담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흐멍다리츠에서 처음으로 정색을 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치지 않았다.



쟝미셸과 국경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사위는 깜깜했고 차는 산을 빙 둘러 깎아놓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농장까지 먼 길을 가야 하는 와중에 우리는 평소처럼 대화를 나눴고 나는 그가 좋다고 말했다. 불쾌한 농담들과 별개로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쟝미셀이 좋았다. 그의 호방하고 유쾌한 성격 덕분에 농장은 나에게 좀 더 편한 공간이 되었고 그에게 스스럼없이 대화를 시도하고 이어나가며 얼어붙었던 입도 어느 정도 트이게 되었다.


물론 그에게 연애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다. 나는 "Je t'aime bien"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love보다 like에 가깝다. 쟝미셸은 농장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구성하는 일부였고, 나는 그를 최대한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쟝미셸도 내가 좋다고 했다. 문제는, 그가 "Je suis un peu amoureux de toi"라고 말했다는 거다. 이 문장은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사랑’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난 너와 사랑에 빠졌어,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와중에 그가 난데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서로 좋아하면 손을 잡는 거라면서 잡아달라고 했다. 갑자기 소름이 훅 끼쳤다. 그가 나를 잠재적 연인으로 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우리는 한창 절벽길을 달리고 있었다.


저는 당신 딸과 나이가 같아요.

그렇지. 근데 네가 내 딸은 아니잖아~


능글맞게 웃는 그를 보며 내 속은 여러 의미로 타들어갔다. 앞서가는 차도 뒤따라오는 차도 없는 가파른 산허리에서 핸들을 조금만 삐끗하면 바로 낭떠러지였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그가 나를 여기서 절벽으로 밀어버리는 상상, 내 몸이 몇 년 후 백골사체로 발견되는 상상을 하며 집에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빌었다.



그의 손은 끝내 잡지 않았다. 다행히 집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잠기지 않는 방문을 밤새 바라보며 혹여나 쟝미셸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다음 날 그는 평소와 같았다. 연인을 보는 듯했던 전날 밤의 징그러운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모든 말이 진득한 농담이었을까?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들을 내뱉은 건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그가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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