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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솔 Dec 20. 2021

느리지만 바쁘게 흘러가는 삶

[프랑스 워홀 일기] 11. 아흐멍다리츠를 떠나며

우프 홈페이지에 내가 남긴 후기를 보고 한국인 우퍼가 쟝미셸의 농장에 다녀갔다고 했다. 그 우퍼는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 하루 만에 도망(?)을 갔다며 쟝미셸은 털털 웃었다. 나에겐 더없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이 농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뜻 추천하기 어려운 이유다.


나도 '집먼지진드기'알레르기가 있다. 그것도 최고단계다. 이곳은 비염 환자에게 사실 최악의 환경이다. 이불속에서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걸 그대로 마시며 살았으니 머리맡에 항상 휴지를 두고 잠들기 직전까지 코를 풀었다. 눈도 참을 수 없이 가려워 눈주름을 걱정할 새도 없이 박박 비볐다. 한국에서 챙겨간 알레르기약을 매일 먹어도 소용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눈은 팅팅 붓고 코는 꽉 막혀 주먹만해져 있었다. 밭에서 일을 할 때는 장갑을 빼기도 귀찮고 휴지를 들고 다니기도 번거로워서 그냥 한쪽 콧구멍을 막고 코를 팽- 풀었다. 그러면 길쭉한 콧물덩어리가 땅에 툭 떨어졌다.



벌레는 말할 것도 없다. 1층으로 방을 옮긴 후 매일 밤 정체모를 소리에 잠이 들지 못했다. 근원을 찾아 방을 뒤져보면 내 손바닥만 한 각다귀가 천장 구석에, 침대 밑에, 창문틀에 사뿐히 앉아 있었다. 처음에 그걸 발견했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차마 손을 뻗진 못하고 멀리서 책을 던져 잡았다. 그렇게 한놈을 잡고 누웠는데 천장에 또 한 마리가 있을 때, 그때의 소름은… 잊지 못한다. 언제라도 내 얼굴로 톡 떨어질 것만 같은 벌레들이 천장에 수두룩했다. 방구석에 거미줄은 기본옵션이었다. 수많은 벌레들과의 동침. 어디선가 인간은 일생 동안 자면서 80마리의 거미를 먹는다는 글을 보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살아보니 수긍이 간다.


아흐멍다리츠에서는 인터넷 신호도 잘 잡히지 않았다. 첫날 마리클레르가 밤늦게 현관문에 기대 있길래 무얼 하나 봤더니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방에선 신호가 전혀 안 잡히는데 문간까지 나오면 그나마 잡힌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그나마 신호가 제일 잘 잡히는 곳에서도 카톡 하나를 보내는 데 30초가 넘게 걸렸고 동영상은 전송 중에 멈춰버렸다.


사실 나는 너무 자랑하고 싶었다. 내가 보는 멋진 풍경과 고되게 수확한 과일과 행복한 추억들을. 안부를 묻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싶은 사진도 많았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비아리츠의 시장에 채소를 팔러 가면 쉬는 시간에 인스타그램을 하기 바빴다. 농장에선 3G도 제대로 터지지 않는데 비아리츠에선 4G가 빵빵하게 터지니 얼마나 신이 났는지, 죽어라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그간 못 올린 사진과 동영상을 올리는 데 열중했다. 뒤돌아보면 그건 아흐멍다리츠에 온 이래 내가 한 일 중 가장 쓸데없는 일이었다.



아흐멍다리츠에서 나는 매일의 삶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걱정과 불안이 마음 한편 단단히 박혀 있었다. 이 워홀이 취업으로부터의 도망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부단히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워홀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 워홀에서 내가 반드시 얻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아흐멍다리츠는 내게 그런 게 없어도 된다고,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매일 같은 시각에 일어나 농장에 가면 날마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느리고도 바쁘게 흘러갔다. 흙은 끊임없이 사람 손을 필요로 했고 내게 주어진 일은 매일 달랐다. 어느 날은 씨앗을 심었고 어느 날은 딸기를 땄다. 하루하루 내 손에 식물들이 심기고 자랐다. 그건 SNS에 내 삶의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 늘어놓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과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그만큼 훨씬 더 쓸모 있고 유익한 일이었다. 오랜만에 겪어보는 생산성의 감각이기도 했다.


아흐멍다리츠에서 딱 한 번 우울했던 적이 있다. 카카오톡을 쭉 훑어보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동갑내기 친구의 프로필 사진을 봤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내가 살면서 이 친구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싶어 착잡해졌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모두가 앞서 나가고 있는데 이렇게 멈춰 있어도 되는 걸까. 이곳에 와서 행복했던 추억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다시 나를 휘감기 시작했다.



피레네 산맥 앞에서 먹는 아이스크림


그다음 날 다미앙과 베로니크는 나를 피레네 산맥에 데려가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라 존스의 Don't know why가 흘러나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예요!"라고 외쳤다. 그러자 다미앙은 볼륨을 높이며 말했다.


"Voilà, c'est pour toi."

자, 너를 위한 거야. 


그 말이 왜 이렇게 가슴에 박혔는지 모르겠다. 그 노래가, 그 노래를 듣는 순간이, 그 순간을 경험할 수 있는 지금이 오직 나를 위한 거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주책맞게 행복해졌다. 벽난로 앞에서 핀초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핀초. 잘 지내지?


15일간의 우핑을 마치고 혼자 보르도 여행을 시작했다. 그토록 바라던 4G가 빵빵 터지고, 먼지는 커녕 벌레 한 마리 없는 깨끗한 침구에 누워 있으니 갑자기 한없이 외로워졌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아흐멍다리츠를 사랑하고 있었다. 알레르기로 고생하며 벌레와 사투하던 기억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며 쌓은 소중한 기억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니, 잊지 않을 것이다.


쟝미셸, 리베, 위흘랑, 마리클레르, 베로니크, 다미앙.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들을 다시 볼 날이 있을까? 그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그때 정말 고마웠다고, 덕분에 참 행복했다고, 곁에 있을 땐 수줍어 전하지 못했던 내 마음을 꼭 온전히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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