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워홀 일기] 12. 리옹에 정착한 이유
보르도 여행을 마치고 리옹으로 향했다. 워킹홀리데이라는 스케치북 위에 아흐멍다리츠에 대한 기억이 알록달록 칠해졌다면 리옹은 스케치북 그 자체였다. 나의 워킹홀리데이의 밑바탕이자 시작과 끝. 여행은 끝났고 리옹에서 나는 말 그대로 '삶'을 일구어야 했다.
파리에서 살아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누군들 사랑과 낭만의 도시 파리를 마다할 수 있을까. 출국을 앞두고 숙소와 일자리를 찾아볼 때에도 모든 정보는 오로지 파리에 몰려 있었다. 문제는 집값이었다. 2019년 기준으로 프랑스의 최저임금은 세후 1170유로였는데, 집 조건이 괜찮아 보이면 월세는 최소 1200유로부터 시작이었다. 이건 뭐 배보다 배꼽이 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배는 없고 배꼽만 있는 수준이다.
그럴 만도 한 게, 파리 크기는 서울에서 3개의 구를 합친 정도지만 근교까지 합치면 인구가 1200만 명이나 된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 1위! 문화예술이 유명하니 유학 오는 학생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이며, 각지에서 몰려드는 이민자들과 나 같은 외노자들까지. 살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땅덩이는 작고 건물 증축은 허용하지 않으니 집값이 어이없을 정도로 높을 수밖에 없다. 뭐, 서울이라고 크게 다른 것도 아니다.
그래도 센 강가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고 에펠탑 앞에서 샌드위치를 베어 무는 로망은 포기하기 싫어서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을 보고 I언니가 프랑스인 친구를 소개해주었다. 리옹 출신으로 파리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그는 내게 딱 적합한 조언자였다. 그리고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리옹이 파리보다 살기는 100만 배 낫다.
특히 매주 전시회를 찾아다닐 정도로 예술에 큰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파리에 살 이유는 없다고 했다. 내 귀가 워낙 얇기도 하지만 듣고 보니 파리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딱히 없어 보였다. 그리고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써먹으며 살기로 결심한 이상 내 인생에 파리에서 살 날이 한 번쯤은 올 것 같았다. 그래서 파리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리옹을 정착지로 정했다.
친구들에게 리옹을 설명할 때 프랑스의 대전 같은 도시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나는 대전에서 나고 자랐는데 정말로 리옹은 대전과 닮은 구석이 많다. 국토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점이 그렇고, 대도시는 아니지만 소도시도 아닌 점, 살기 좋지만 노잼인 점도 그렇다.
최근에는 리옹의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고 한다. 파리가 지긋지긋해 떠나온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리옹 출신이 아닌데 리옹에 정착한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비슷하다. 파리는 사람이 너무 많고 물가도 비싸고 시민들도 친절하지 않다…… 파리를 잠시나마 돌아본 내가 느낀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리옹은 프랑스에서 파리와 마르세유 다음으로 큰 도시이지만 사람이 많다는 걸 피부로 느껴본 적은 없다. 살아보니 리옹은 대체로 조용하고 평화롭고 잔잔하다. 나는 이렇게 작고 소중한 노잼도시들이 좋다.
리옹에는 에펠탑은 없어도 푸르비에르 성당이 있고, 센 강은 없어도 론 강은 있다. 부숑과 디저트가 유명한 미식의 도시이고 프랑스 어디로든 통하는 교통의 요지다. 단언컨대 파리 못지않게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도시가 리옹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도시였지만 리옹이라고 집 구하기가 쉬울 줄 알았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