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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솔 Dec 06. 2021

언어가 부족한 걸까
센스가 부족한 걸까

[프랑스 워홀 일기] 9. 언어의 장벽

나는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매번 E와 I가 비슷하게 나온다. E성향이 45%, I성향이 55%로 딱 5퍼센트 차이다. 근소한 차이지만 한 번도 E가 I보다 높게 나온 적은 없다. 가까운 사람들과 있으면 곧잘 분위기를 주도(한다고 생각)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과는 어색하기 일쑤다. 그곳이 외국이고 상대가 외국인이라면 더욱. 


도대체 대화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감도는 침묵을 견디다 못해 맥락 없는 말을 내뱉은 적도 많다. 예를 들면 다미앙과 베로니크 부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나는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베로니크가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사에서 근무했다는 말을 듣고 "그럼 만나본 연예인 중에 누가 제일 잘생겼어요?ㅎㅎ"라고 순진하게 물었다. 베로니크는 당황한 듯 다르덴 형제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를 찍기 때문에 모르겠다고 답했다. 


아, 나도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을 참 좋아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 <언노운 걸> 모두 인상 깊게 봤다. 공통의 관심사가 있는데도 왜 저런 식으로 유치한 질문밖에 할 수 없었을까? 그 질문이 프랑스어로 만들기 가장 쉬웠기 때문이다. 두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기에는 나의 프랑스어 실력이 너무나 모자랐다.



언어의 장벽은 생각보다 높고 두터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고 있다 보면 빠르게 흘러가는 대화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었다. 또 내 생각을 온전하게 표현하기란 너무 어려워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날이 점점 추워져 거실의 벽난로에 불을 때기 시작했다. 벽난로는 꽤나 낭만적인 장면을 자아냈다. 그 앞에서 빨래도 말리고 와인 한 잔 마시며 '불멍'도 할 수 있었지만 불을 피울 때마다 연기가 2층의 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처음 불을 지핀 날 나는 연기를 들이마시며 잠에 들어야 했지만 이러다 죽지는 않겠지, 혼자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다 1층을 쓰던 부부와 방을 바꿔 쓰게 되었다. 2층에서 처음 밤을 보낸 다미앙은 다음날 내게 물었다. 네가 방을 쓸 때도 이렇게 연기가 자욱했냐고. 그렇다고 답하자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며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해도 된다고 일러주었다. 우리는 집을 같이 쓰는 사이잖아,라면서.


그때서야 깨달았다. 내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가만히 있으면 후에 남들에게 더 큰 불편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프랑스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일을 마치고 한가로운 오후 시간에는 (학교 다닐 때도 안 깔았던)프랑스어 회화 어플을 깔고 몇 문장씩 외웠다.


불멍하며 저녁식사. 메뉴는 버터밥과 배추볶음! 이래 봬도 맛있었다.
귀엽게 바지 말리는 중


언어의 장벽은 어찌어찌 노력해서 넘을 수 있어도 타고난 성격과 센스를 극복하기는 더 어려운 것 같다.


농장에서 리베와 마리클레르는 유독 친했다. 둘은 대화하면서 많이 웃었다. 마리클레르는 나처럼 2주 동안 농장에 머물렀다. 리베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마리클레르를 보며 나도 2주 후에는 프랑스어도 늘고 리베와 저렇게 친해질 수 있을까 희망을 품었지만 2주 후에도 리베와 나는 여전히 '어사'(어색한 사이)였다.


마리클레르가 떠나는 날이었다. 리베가 마지막 날인만큼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고 해 셋이 식당에 갔다. 우리 농장에서 파는 채소를 받아다 비건 요리를 만드는 레스토랑이었다. 우리는 각자 메뉴를 선택했다. 모두 다른 요리였다. 내가 열심히 내 몫의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둘은 서로의 접시 안에 든 음식을 나누어먹었다. 서양인들은 숟가락 섞이는 걸 싫어하는 문화 아니었던가? 심지어 우리가 주문한 음식은 썰어먹는 스테이크도 아니고(비건 레스토랑이니 당연하다) 숟가락을 푹 집어넣을 수밖에 없는 진득한 수프였다. 아랑곳 않고 서로의 음식을 맛보는 리베와 마리클레르 사이에서 뻘쭘한 건 나뿐이었다. 나는 정말 그들이 불쾌할까 봐 물어보지 않은 것인데… 졸지에 이기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마리클레르가 떠나고 나니 리베는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단둘이 집에 가는 길에 운전하는 리베가 졸지 않도록 옆에서 계속 말을 걸었지만 뚝뚝 끊기는 어색함은 막지 못했다. 아, 나는 왜 분위기를 띄울 수 없는 걸까. 한탄스러웠다. 이 날 집에 와서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다.


gentil한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 말이 잘 안 통해서 그런지 대화에 쉬이 끼지 못하겠다. 내가 내향적이라 그런가?


C'est gentil. 프랑스에서 자주 듣고 자주 하는 말이다. 누군가 호의를 베풀어주거나 배려심을 보일 때 프랑스 사람들은 습관처럼 이 말을 내뱉는다. 나는 졍띠-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들의 졍띠-함을 받기만 한 것 같다. 리베는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기차가 없어 예정보다 이틀 더 농장에 머무르게 되었고 10월 말에 예정되어 있던 쟝미셸의 가족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프랑스 곳곳에서 친척들이 모두 모였다. 대략 30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집안이 사람들로, 정확히 말하자면 '프랑스' 사람들로 꽉 찼다. 나는 유일한 아시안으로서 주목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소외되어 투명인간이 되는 편을 택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쟝미셸의 딸들을 비롯해 내 또래의 젊은 친척들은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셨지만 그 테이블에는 낄 수 없었다. 대신 부모님뻘되는 쟝미셸의 친척들 옆에서 조용히 밥을 먹고 내 방에 들어가 잤다. 그저 피곤했다.


어렵고 아쉽다. 이방인의 지위를 벗어나지도, 한껏 이용하지도 못한다는 게.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나는 그냥 웃어 보이곤 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누군가에겐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농장지킴이 쇼세뜨와 핀초. 웃지 마, 정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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