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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솔 Dec 04. 2021

우리는 국경에 갈 거야

[프랑스 워홀 일기] 8. 유럽의 국경

마리클레르가 떠난 후 다미앙·베로니크 부부가 나의 새로운 하우스메이트가 되었다. 둘은 우핑을 하러 온 나와 달리 농장의 진지한 수습생이었다. 매년 이맘때쯤 쟝미셀의 농장에서 수습기간을 보내 농장 사람들 모두와 이미 친했고 농사일에도 능숙했다. 내가 오전 일을 끝내고 기진맥진하여 낮잠을 자고 있을 때에도 부부는 오후 늦게까지 쟝미셸과 리베를 도왔다.(다미앙은 나보고 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인처럼 잠을 잔다고 했다) 은퇴 후 피레네 근처에 집을 얻어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베로니크가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첫날 간이역에 리베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때, 농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눈앞에 보이는 저 산이 피레네 산맥인지 물었다. 지도에서 아흐멍다리츠는 스페인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알프스에서 치즈를 만들던 I언니를 떠올리며 나는 피레네소녀 하이디가 될 생각에 마음이 붕 떠 있었다. 그런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 나를 보며 리베는 빵 터졌다. 저건 그냥 동네 뒷산이야. 피레네는 꼭대기가 하얗지 않겠어? 듣고 보니 피레네 치고는 산이 너무 야트막했다. 아흐멍다리츠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아쉽게도 농장에서 피레네는 보이지 않았다. 제주도에 발만 딛는다고 한라산을 볼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그렇게 환상으로만 품고 있던 피레네 산맥에 갈 기회는 머지않아 주어졌다.

 


"On va à la frontière."


우리는 국경에 갈 거야.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는 아니어도 피레네는 실제로 멀지 않았다. 농장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를 달리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 닿았다. 그리고 국경에는 관세가 붙지 않아 상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마트가 있었다. 쟝미셸의 농장에 방문할 때마다 애연가인 다미앙은 담배를 잔뜩 쟁이러, 요리를 좋아하는 베로니크는 스페인의 식재료를 사러 꼭 들르는 곳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내가 큰 관심을 보이자 주말에 나를 데려가 준다고 했다.


그렇게 토요일에 우리는 국경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완전한 산맥이었다. 가파른 산을 감자 깎듯 굽이굽이 돌았다. 그런데 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쯤 나는 헉- 숨을 들이쉬었다. 여권을 놓고 왔다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미 한참을 달린 상태였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섣불리 말도 꺼내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솔직하게 말해야 되나, 그냥 모른 척하고 가야 되나, 그러다 검문소에서 걸리면 더 난감해질 텐데, 아 어떡해! 결국 나는 슬며시 여권을 놓고 왔다고 이실직고했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운전 중이던 다미앙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C'est pas grave. On est en Europe."

괜찮아, 여긴 유럽이니까.


베로니크는 한 술 더 떠 여기가 이미 스페인 땅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리의 자동차는 언젠지도 모르게 프랑스 땅을 슥 지나 스페인 땅을 밟아나가고 있었다. 국경에 검문소나 경찰 같은 것도 없냐고 물으니 없단다. 그게 바로 유럽연합이었다.


여기부턴 프랑스. 고작 표지판 하나로 국경이 결정된다


솔직히 믿을 수가 없어서 상점으로 향하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여권은 역시 필요 없었다. 프랑스에서 출발한 차는 어떤 장애물도 만나지 않고 스페인 땅에 잘 도착했다. 땅의 경계에는 각각 Spain, France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이 서 있을 뿐이었다.


국경에는 굵은 선이라도 쳐져 있을 줄 알았다. 군인들이 여권을 검사하고 신원을 확인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도 국경을 벗어난다는 건 모종의 '떠남'을 의미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토록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는 게 유럽의 국경이라니. 신분을 증명하지 않고도 나라 간 신뢰를 등에 업고 국경을 넘는 그들이 나는 신기하고 부러웠다. 우리나라는 진정 섬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조금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대통령이 북쪽으로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전 세계가 떠들썩해지는 나라에서 온 나는 유럽인들의 국경 관념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뒤로는 스페인, 앞으로는 프랑스!


앞을 보면 프랑스, 뒤를 돌면 스페인. 그 한가운데 웅장하게 솟은 피레네 산맥의 가파른 골짜기를 바라보며 식사를 했다. 식탁 주변에는 생전 처음 보는 양인지 염소인지 모를 동물이 먹을 걸 주워 먹으려고 기웃거렸다. 누구 하나 돌을 던지거나 쫓아내는 이 없이, 손님들 사이를 제자리처럼 누비던 그 동물의 사탕처럼 땡그랗던 눈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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