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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Aug 20. 2021

텃밭 도시락

가을 농사

   "더 늦기 전에 배추와 무 씨를 뿌려야겠어."     

   아침에 동생에게 일러놓고 냉장고에 넣어 둔 씨앗 꾸러미를 꺼냈다. 작물 씨앗들은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오래 묵은 씨도 냉장해 둔 것은 발아율이 좋다고 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산골 초기에 구입한 씨들, 그러니까 팔 년 정도 된 씨들이 아직 남았는데 여전히 발아율이 좋다. 냉장고의 저온과 어둠이 겨울 역할을 하는 때문이다. 냉장고에서 긴 잠을 자던 종자들이 따뜻한 실온을 만나면 봄이 왔다고 여기게 된다. 이제 깨어나야지,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배추와 무, 알타리 말고도 봄에 뿌렸던 루꼴라와 비트, 쌈 채소 몇 가지도 꺼내 두었다. 씨를 현관 앞에 정리해 둔 뒤엔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도시락 싸서 새참으로 먹게 해 줄게." 동생에게 말해 두었다. 농사일에 관심 없는 동생을 꼬여내기엔 도시락만 한 게 없다. 말해놓고 나니 다소 켕긴다. 동생을 핑계 삼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꼬여내는 것이기도 하다. 도시락이라도 싸 두어야 기분 내어 텃밭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며칠 째 가을 농사를 시작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봄 농사도 그다지 부지런 떨지 못하는지라, 가을 농사는 미적대다 때를 놓칠 때가 많다. 올해는 가을 농사를 좀 더 일찍 시작해도 좋았다. 팔월 중순이 이렇게 선선한 적은 드물었다. 밤과 낮 기온이 두 배 가량 차이가 난다. 밤 기온은 15도까지 떨어지고 낮엔 30도 가까이 오른다. 새벽마다 차가운 이슬이 비처럼 내리고, 한낮엔 볕이 충분히 뜨겁다. 차갑고 뜨거운 리듬이 작물의 단단한 성장을 돕고 깊은 맛을 들게 한다. 이웃 농부의 말씀이다. 오전 9시 조금 넘은 시각.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기분 좋게 느끼며 도시락 싸기를 마쳤다. 잡곡밥에 미나리나물과 비트 장아찌를 넣은 두 가지 주먹밥, 감자전, 오이절임. 늘 먹는 대로의 밥과 찬인 데도 둥근 나무 그릇에 담아놓으니 새롭게 보였다.       


  동생은 벌써 나가 마당의 풀을 뽑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고 마당엔 볕이 가득해졌다. 씨 뿌리기 전 텃밭 풀도 매야해서 마음이 바쁜데 띠링, 스마트폰 알림 소리가 들렸다. 도시락 싸는 중에도 두 번이나 울렸다. 국지성 호우가 예상되니 산간계곡 하천 등 위험지역 방문을 자제하여 개인 안전관리에 유의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수시로 도착하는 안전 안내 문자. 팔월에 들어선 뒤로 도청에선 하루 두 번씩 물놀이 안전수칙 준수를 당부했고, 질병관리청에선 백신 접종 예약에 대한 안내를 줄곧 보내왔다. 코로나 19 신규 확진자 수 집계는 물론, 증상이 의심되면 즉시 검사하라는 당부도 연이어 날아왔다. 동생 스마트폰은 수신거부를 해놓아 잠잠하다. 나도 웬만한 알림 문자는 막아 놓았지만 안전 안내는 열어 두었다. 산골 외딴곳에서 둘만의 생활. 한 사람은 안전에 대한 안내를 받을 필요가 있다     


 안전 안내.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용어다. 코비드 세상이 되기 전엔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사람들이 떠올리게 되는 건 안전이 아닌 불안일 것이다. 사실 바이러스나 기후 위기가 아니더라도 무생물이 아닌 이상 안전한 세상은 가능치 않다. 생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나마 개인의 안전을 지켜주려는 나라에 태어난 것은 다행이라 여긴다. 어차피 존재해야 한다면 지금 현세에 속한 것도 다행이다. 과거의 어느 시점을 택해 태어날 수 있는 선택이 주어진다 해도 나는 현시대를 원했을 것이다. 옛 세상은 공기는 맑았을지라도 지금보다 안전했다고 여기긴 힘들다. 고대와 중세, 크고 작은 나라가 형성되는 과정은 온통 분쟁과 침략의 연속이었으니까. 종교나 계급적 핍박은 무시무시했을 것이고, 전쟁의 참혹 속에 일개 개인의 안전은 전혀 관심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계급이 철저히 정해진 시대에 하층민으로 태어났으면 어쩔 뻔했나. 특히 여성은 인권도 자유권도 안전권도 없이 소유의 개념에 속하던 시대. 긴 인류 역사에서 보자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국경 넘어 지금도 그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곳이 있다. 그러니 기후 위기와 미세 먼지, 바이러스의 세상일지라도 그나마 안전 안내를 받는 나라의 국민으로 현세를 살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다행이라 해도 마땅한 건 아니다. 뉴스 기사 머리글만 보아도 울렁거리는 현실. 멀리 볼 수도 없으니 앉은자리에 시선을 꽂을 뿐이다. 한참 풀을 뽑고 흙을 뒤집는 동안 어수선했던 기분이 잠잠해졌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역시 정신의 휴식이다.  땀이 흐르고 단순한 기쁨이 배인다. 때맞춰  바람이 시원스럽다 싶더니 이내 구름이 몰려왔다. 순식간 어둑해진 하늘. 끓어오르던 풀벌레 소리도 일순 조용해졌다. 곧이어 쏴아 쏟아지는 빗줄기. 일을 마치지 못했건만 어째 반가운지. 호미와 낫을 서둘러 정리하여 동생과 집으로 들어왔다. 남은 일은 언제고 마무리하게 되겠지. 갈수록 헐거움이 는다. 자랑일까. 완벽에 결벽 평가를 듣던 시기도 있었다. 옷만이라도 헐렁하게 입으며 느슨함을 흉내 냈다. 무늬만이라도 흉내를 내면 어느 정도 물들게 된다.  텃밭 도시락은 안전한 집안에서 먹게 되었다. 알량하나마 가을 농사를 시작했으니 새참 먹을 기분은 충분했다.  

  "도시락은 왜 집에서 먹어도 즐거운 걸까?"    

 도시락 뚜껑을 열며 내가 말했다.

  "그래서 도시락인 거잖아. 즐거울 락." 

 동생의 말에 어? 솔깃했다.

  "정말? 락이 그거였어? 어머 몰랐네."  

 도시락을 먹고 헤어진 뒤 검색을 해 보았다. "그것도 몰랐어?" 하던 동생의 묘한 웃음이 걸렸다. 도시락. 한자어가 아니었다. 참 내, 속았다. 우리말 '도슭'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도슭'은 고리버들로 만든 '동고리' 혹은 대나무 줄기로 만든 상자 '당새기'와 모양새와 쓰임이 비슷하다 하였다. '도슭'에 접미사 -악이 결합되어 '도스락' 되었다가 '도시락'이 되었다는 것. 유래라는 게 어느 정도 짐작인 것이니 속 시원한 어원은 아니었고, 즐거운 락이 아닌 것엔 살짝 서운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동고리, 당새기란 이름은 그새 또 마음에 들어왔다. 애초에 그 이름으로 불렀으면 싶었다. 이런 별거 아닌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좋다. 어쭙잖은 농사도, 엉거주춤 다가온 가을도. 코스모스는 진작 피었고 대충 싼 도시락에 하루가 즐거울 락.      



가을 작물 씨앗
비트 주먹밥, 나물 주먹밥 도시락
렌틸콩밥, 고추지, 콩조림, 매실절임, 감자볶음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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