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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Sep 19. 2020

푸른 밥상

오직 선명한 건 지금 내 앞에 있는 기쁨이다

     

사방이 온통 푸르다. 온갖 생명이 자아내는 푸름이다. 산골의 밤은 여전히 차갑지만 아침이면 떠오르는 태양에 대기는 순식간 뜨거워진다. 달궈진 대기에 스며든 습기는 다시 어둠 속에서 차가운 이슬이 되어 내린다. 차갑고 뜨거운, 그 장단에 맞추어 마당의 풀도 작물도 한창 탄력을 받았다. 낫이며 호미를 동원해 날마다 걷어내도 그 기세를 감당하기 힘들다. 하루가 다르게 부풀고 있는 숲도 이젠 더 이상 그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한없이 삼킬 수 있는 짙푸른 심연이다. 푸름에 취한 새들은 거의 흥분 상태다. 이른 새벽부터 부산스레 몰려다니며 온갖 소리를 내지른다. 흉내 내기도 힘든 괴상하고 희한하고 아름다운 갖가지 소리와 리듬. 은둔 기질이 있는 나도 그쯤 되면 어쩔 수 없다.

  

장화를 꿰차고 일찌감치 마당으로 나선다. 풀을 매고 작물을 한 바구니 가득 담는다. 오늘은 고춧잎과 서울배추, 겨자채, 두메부추, 적상추, 청상추, 깻잎, 바질, 파가 그득 담겼다. 꽃대가 올라온 지 꽤 되어 늘 이젠 마지막이 아닐까 하며 끊어내는 루꼴라도 아직은 두어 줌 더 할 수 있다. 마음껏 꽃을 피우게 그냥 둘까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오랜만에 딸아이가 와 있는 것이다. 루꼴라 피자와 샐러드를 좋아하는 아이다. 한창 풍성할 때 살짝 데쳐 냉동실에 차곡차곡 저장도 해놓고, 김치도 담아 놨지만 루꼴라는 생으로 먹어야 가장 맛이 좋다. 며칠만 더 참아주라, 루꼴라 꽃대를 꺾으며 나는 말한다. 꽃이 맺힐 때마다 끊어내니 저들로선 비상사태다. 이젠 속도가 점점 빨라져 하루 만에 다시 꽃을 피우고 씨를 만들어 낼 지경에 이르렀다. 다음 세대를 반드시 내겠다는 비장함이 극에 달했다. 행주 삶은 것 같은 맛이야. 몇 년 전 루꼴라를 처음 맛보았을 때 동생이 했던 말이다. 웬만한 풀은 다 좋아하는 내 입에도 조금 어색한 맛이었다. 들풀에 치즈가 섞인 것 같은 맛과 질감에, 낡은 천 냄새를 풍기는 야릇한 풀이었다. 루꼴라 맛에 빠져드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작물 모종 내는 일엔 도통 관심 없던 동생이 올봄엔 루꼴라 모종을 직접 내기에 이르렀다. 루꼴라 못지않게 내 텃밭의 인기 작물인 서울배추도 이제 머지않았다. 한두 포기는 벌써 잎이 뻣뻣해지며 가운데에 노란 꽃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딸아이가 있을 동안은 충분히 먹일만하다. 내 입맛을 닮은 딸아이는 서울배추로 만든 전도 겉절이도 좋아한다. 고소하고 매콤하게 무친 겉절이는 이미 냉장고 깊숙이 두 통이나 들어 있다. 냉동실에도 몇 통 얼려놓았다. 한여름 땡볕에 푸성귀가 귀해질 때 꺼내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마당의 조그만 텃밭에서 끊이지 않고 올라오는 생명들. 그 생명에 깃들어 사는 또 다른 무수한 생명들. 모두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하다. 날마다 텃밭을 돌며 잎을 끊어내는 나도, 그에 맞서 계속 잎을 내는 채소들도 각자의 본분을 다하느라 열심이다. 이게 모두 무엇을 위한 열심인지, 가끔 텃밭에 서서 생명들을 본다. 단지 후생을 이어가기 위한 맹목적인 치달음, 정말 그뿐일 것일까.  

 

 두 번째 출산을 마친 마당 고양이 율무도 요즘 후생을 키워내는 일에 열심이다. 어미가 된 뒤 더 지혜롭고 강해진 율무에 대해 동생은 어른을 대하듯 존경마저 품고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동생은 자신을 어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도 의젓하고 침착하게 할 일을 해나가는 율무에 견주어 동생은 아직 아이 같다. 마당 고양이가 한 녀석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전전긍긍이다. 이젠 율무의 두 번째 아기 고양이들까지 그 근심에 보태졌다. 내가 볼 때 동생의 정성은 좀 넘치는 면이 있다. 새벽부터 고양이 먹이를 챙기기 시작해 하루 세끼 사료를 먹이고도,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 고양이가 허기질까 간식까지 열심히 챙긴다. 그 정도야 뭐라 할 것 없고 나로서도 흐뭇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 젖먹이인 아기 고양이들까지 못 챙겨 안달인 것엔 심사가 조금 꼬인다. 율무는 왜인 진 몰라도 안전한 우리 마당을 두고 두 번 다 이웃집의 복잡한 창고 어느 구석에선가 출산을 했다. 작년에도 그랬듯 새끼들에게 사료가 필요할 즈음이면 마당에 데려올 눈친데, 동생은 굳이 젖 먹이러 가는 어미를 따라간다. 이웃집 비닐하우스 너머에서 아기 고양이가 나타나길 기다려 사료를 먹이고 오는 것이다. 율무가 새끼를 부르는 특유의 소리를 내면 숨어 있던 아기 고양이들이 나타난다. 더러 한 녀석 정도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동생은 나머지 아기 고양이가 나타날 때까지 이웃집 비닐하우스 안에 잠복해 있기도 한다. 작물이 한창 자라고 있는 남의 하우스에 가지 말라고 일러두어도 소용없다. 얼마 전에도 내가 마당에서 한창 풀을 매고 있을 때 동생이 뒷마당에서 나타났다. 아기 고양이들에게 또 사료를 먹이고 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겸연쩍어 보이는 표정으로 짙푸른 오이 하나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수상쩍었다.

 “웬 거니?”

동생 얼굴과 오이를 번갈아보며 나는 물었다. 이상스레 큼직하고 때깔 좋은 오이를 보니 불안했다. 우리 집 오이는 이제 막 꽃을 맺었고, 지금껏 그렇게 보기 좋은 오이가 열린 적도 없다.

 “하우스에 주인 언니가 나타나 얼른 숨었는데….”

“야, 숨으면 어떡해. 괜히 수상하지. 그리고 거기 숨을 데가 어디 있어?”

나는 호미를 팽개치고 몸을 일으켰다. 하우스 안에 숨을 데라곤 넝쿨을 타고 달리는 호박잎 아래 정도다.

 “근데 그 언니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거야. 흥얼흥얼. 그러다 불쑥, 오이 하나 드릴까요? 하더라. 아무래도 나한테 말하는 거다 싶어 슬그머니 일어났지.”

 “내가 못살아 정말. 그냥 고양이 보러 왔다고 말하지 그랬어.”

이웃에게 창피하기도 하고 엉겁결에 숨었을 동생 꼴을 생각하니 우습기도 했다. 짐짓 노래를 불러 동생에게 기척을 알리고 말을 건넨 이웃 여자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걸 보면 동생을 두고 달리 생각진 않은 모양이지만 우세스러운 일이긴 했다. 그날 동생이 얻어온 오이로는 비빔냉면을 만들어 주었다. 최고야! 한 입 맛본 동생 입에서 철없는 감탄이 나왔다. 향긋한 오이채를 가득 넣은 냉면은 내 입에도 유난히 맛깔스러웠다. 이제 아기 고양이들은 동생에게 익숙해져 하우스 너머로 곧잘 나타난다고 한다. 못 말릴 일이다. 율무가 사료를 입에 물어 날랐다지만 그건 도움이 필요한 절박함이 아니다. 새끼를 챙기는 어미의 본능이자 기쁨인 것이다.


  거둬온 텃밭 작물을 손질해 냉장고에 넣어둔 뒤 나는 다시 마당으로 나간다. 아침 11시가 넘었건만 아직 딸아이는 자고 있다. 아주 먼 곳을 곤하게 다니다 온 사람처럼 집에만 오면 오래도록 깊은 잠에 빠지는 딸이다. 어제도 오후 1시가 되어 비틀비틀 방에서 나왔다. 얼마든지 자라, 나는 조심조심 문을 여닫으며 다닌다. 구름이 짙게 깔려 덥지는 않다. 이번엔 나물거리를 할 생각이다. 마당 여기저기 자라고 있는 참비름이며 왕고들빼기를 툭툭 끊고, 뒷마당의 머위와 산기슭의 취도 몇 줌 꺾어온다. 손질할 것도 없이 깨끗한 잎들을 씻어 빠르게 데쳐낸다. 참비름과 왕고들빼기는 고춧잎과 함께 간장에 무치고, 취와 머위는 된장에 무친다. 순식간 구수하고 쌉싸래한 나물무침 몇 가지가 완성된다. 그 사이 나물 데친 물엔 된장을 풀어 배춧국을 끓여 두었다. 무슨 일이든 좀 느릿하게 하는 나지만 서울 가족이나 딸이 와 있을 땐 절로 민첩해진다. 여긴 이걸 저것과 함께 넣고, 저긴 쟤랑 요걸 섞고, 맛의 조합이 생각나는 동시에 손이 따른다. 된장소스며 간장소스, 월남쌈 소스도 뚝딱 만들어진다. 냉장고에 넣어둔 채소만 꺼내면 채소 덮밥과 볶음국수, 월남쌈, 냉면 따위, 아이가 원하는 걸 바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부엌 정리를 마친 뒤 동생과 차를 마신다. 소리를 죽여 나직하게 말을 나눈다. 둘 다 자는 아이를 깨우고 싶지 않다. 아이가 집에 돌아와 자고 있으면 세상이 평화롭게 여겨진다. 낯선 곳을 두루 다니며 일을 하는 아이다.

 “님들, 무슨 얘길 그리 재미나게 하시나.”

뒷문이 쓱 열리더니 아이가 나타난다. 아이의 방은 뒷문 너머에 있다.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

동생 목소리가 커진다.

“아까 일어났는데 일 좀 하다 나왔지.”

부엌으로 간 아이가 물 한 잔을 가득 따른 뒤 소리도 경쾌하게 쭉 들이킨다. 조용하던 집안에 돌연 활기가 돈다. “여기 와서까지 뭔 일을 하니. 열심히 좀 살지 마.”

내가 말한다.

“그런 말이 더 무서워요. 괜히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다니까.”

아이가 의자 하나를 끌어와 제 이모 옆에 앉는다.

 “맞어. 니 엄마 말엔 의도가 숨어 있어.”

동생이 맞장구친다. 셋이 모이면 늘 둘이 편을 먹는다. 이모를 상대로 계속 종알대는 아이의 말을 들으며 밥을 차린다. 배추 된장국에 나물 반찬, 두부구이에 쌈채소. 둘은 모른다. 열심히 살지 말라는 내 말에 숨은 의도는 없다. 오래전 아이가 태어날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말의 앞뒤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 생각이 떠오를 때의 삶은 한결 느슨해진다.

“그만 지껄이고 와서 밥 먹어.”

내 말에 아이가 식탁에 다가와 앉는다. 차려 준 것이 흡족한지 얼굴에 웃음이 핀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무수한 생명들을 통과해 생은 저 혼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끝내 알 수 없다. 오직 선명한 건 지금 내 앞에 있는 기쁨이다. 푸른 밥상. 맛있다! 된장국을 한 입 떠 넣은 아이가 말한다.


적상추, 서울배추, 깻잎, 파슬리, 루꼴라, 바질
호박잎 쌈과 두릅튀김, 잡곡밥
당귀 튀김과 머위쌈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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