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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Sep 19. 2020

꽃잎이 날린다

봄날은 간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문을 열고 나설 때마다 사방이 꽃무리다. 일찌감치 피기 시작한 보라색 제비꽃이며 노란 꽃다지, 민들레가 여전히 마당 가득 깔려 있고, 텃밭 고랑엔 냉이의 하얀 꽃이 흔들리고 있다. 발그레한 앵두꽃과 하얀 자두꽃이 활짝 꽃잎을 열어 바람을 타고, 그 흥을 받아 복숭아꽃 분홍도 툭툭 터지고 있다. 마당을 지나 길을 따라가면 흰쌀밥 같은 조팝나무 꽃이 쏟아진다. 밥 익는 냄새가 난다는 하얀 조팝나무 꽃. 기분 좋은 현기증이다. 꽃을 보고 있으면 쿵쿵, 낮은 울림이 멀리서부터 다가온다. 아름다움에 대한 반사이기도 하고, 함께 살아 있음의 공명이기도 하다. 꽃을 한껏 보고 돌아온 밤이면 자면서도 바람소리에 귀가 열린다. 꽃이 지겠다, 몸을 뒤척이게 된다. 이맘때의 잠은 그래서 꽃잠이다. 자면서도 꽃잎이 날린다.

  

한동안 집안일이며 텃밭일 다 미루고 벚꽃 구경을 다녔다. 일이야 미룬다고 허전할 것 없지만, 꽃을 놓치면 한 해가 시무룩하다. 어제도 이웃마을까지 쉬엄쉬엄 걸어가 돌아왔다. 어둑한 숲 속엔 진달래의 차분한 분홍빛이 아직 남아 있었고, 볕이 환한 산기슭과 들판엔 산벚꽃이며 복숭아꽃 분홍이 침엽수의 가지런한 초록 속에 폭넓은 치마처럼 펼쳐졌다. 길섶마다 꽃다지와 민들레, 제비꽃도 소복했고, 새로 핀 연보라색 종지나물 꽃도 소담하니 모여 있었다. 도로가에 늘어선 벚나무는 마지막 남은 꽃잎들을 날리고 있었다.   


  “지난주가 절정이었네.”

  바람에 흩어지는 꽃잎을 보며 동생이 말했다.

  “꽃은 질 때가 절정이야.”

  나는 중얼거렸다.

  “언니보다는 덜하지만 나도 꽃을 보면 좋긴 해. 근데 그런 건 왜 있는 걸까, 좋다는 감정 같은 거.”

동생이 말했다.

“그러게, 그런 게 왜 있을까.”

내 시선도 날리는 꽃잎을 따라갔다. 봄엔 눈도 꽃처럼 날리고, 꽃도 눈처럼 날린다. 얼마 전엔 서리가 내려 마당에 내놓았던 바질과 호박 모종이 얼어버렸다. 사월 중순에 눈이 내리기도 하는 산골엔 앞뒤를 불러내는 음의 장단처럼 눈과 꽃이 어우러진다. 그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아득하기도 하고, 발끝이 들리는 것도 같다. 우리가 보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이 반사하는 빛이라고 한다. 시각이 감지하는 여러 빛의 자극에,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동생 말처럼 왜 그런 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일까. 아름답고, 싱그럽고,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여기는 마음.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다. 살갗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아리고, 매끈하고, 까칠하고, 단단한 그런 것들. 또 귀에 들려오는 빗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며 온갖 향기롭고 그리운 냄새들과 달고, 쓰고, 매콤하고, 고소한 맛들에 대한 반응. 그 미묘하고 섬세하고 바닥을 알 수 없이 오묘한 감각들.


“내가 말해 줄까?”

동생이 말했다.

“뭘?”

“꽃이 왜 좋은지. 결국 생존인 거야. 서로를 돕는 신호체계.”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내가 말했다.

“얼마 전에 언니가 그랬잖아. 식물의 유도 작전.”

“응, 그러니까 벚나무가 인간이 좋아할 꽃을 피워 이 도로변에 자신이 심어지도록 유도했다는 거? 그리고 우리는 기분 좋은 자극을 받아 산책을 하는 걸로 살아갈 힘을 얻고. 그게 그런 내용이었나?”

 

 읍내 외출이 잦았던 지난주, 도서관에 잠시 들러 빌려 본 책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동물의 행동은 식물의 유도에 의한 경우가 많다. 인간이 정착 생활을 하며 볍씨를 심게 된 것도 벼의 유도 작전이다. 그렇게 좀 더 다양하고 우세한 품종을 기르도록 만들고, 더욱 많은 양을 생산하도록, 식물이 인간을 지배해온 것이다.’ 도서관 앞 작은 공원에 앉아 동생과 보온병의 커피를 나눠 마시며 넘겨 본 ‘욕망하는 식물’이란 책이었다. 건성으로 보았던 터라 그 뒷얘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모르겠다. 요즘엔 좀처럼 집에까지 책을 빌려오게 되지 않는다. 눈이 침침한 건 그렇다 치고, 만사 귀찮은 증상이 생겨 책을 돌려줘야 하는 것이 번거롭기도 했다.

  그곳에도 꽃이 많았다. 우리가 앉은 의자 아래 자잘한 아기별꽃, 쇠별꽃이 보이고, 가장자리를 두른 벚나무 사이 노란 황매도 줄줄이 피어 있었다. 가운데 조경으로 박아 놓은 바위 옆엔 영산홍이 지나치게 붉었다. 공원 너머론 이차선 차도를 따라 여관이며 음식점, 중국집 같은 낡고 오래된 건물이 이어졌다. 그 희미한 채색과 눈앞 선명한 꽃무리의 대비는 묘한 정취를 느끼게 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좁은 차도엔 흙먼지가 일었다. 오래된 필름을 돌리듯 뿌연 도로 위를 차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졸리듯 눈이 자꾸 무거워졌다. 어쩐지 자고 깨어나면 다 꿈일 것 같은 아득함이 느껴지는 오후였다. 동생이 그런 내 증상을 간단히 정리해주었다. 그냥 춘곤증이야.


  한동안 비 소식은 없을 모양이다. 건조한 바람이 부는 나날이다. 지난밤엔 바람소리가 요란했다. 어디서 오는 바람인지 쏴아, 몰려오는 소리에 비가 오는가 싶기도 했다. 아, 이제는 정말 벚꽃이 다 졌겠다. 설핏 깨어나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마음을 붙잡는 것이 사라지니 차라리 편했다. 날이 밝은 지금, 그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 고요하게 멈춘 세상에 옅은 안개가 차 있다. 안갯속 마당에 복숭아꽃이 보인다. 희미하게 번진 연분홍. 벚나무 따라 길을 걷던 일도, 공원에서의 짧았던 한 때도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꿈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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