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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Sep 17. 2020

무엇이 우리를 잠 못 들게 하나

생의 함정

  사월이다. 남쪽 섬으로 여행 간 엄마가 일찌감치 꽃 사진을 폰으로 보내오더니, 서울 사는 딸아이도 도로변 가득 환하게 무리 지어 핀 벚꽃 소식을 전해왔다. 이곳 길가의 벚나무엔 이제 막 꽃망울이 맺히고 있다. 그래도 집 옆 벼랑엔 노란 생강나무 꽃이 점점이 피었고, 마당에는 보랏빛 제비꽃도 몇 송이 도톰하게 올라왔다. 멀리 산기슭엔 진달래 연분홍 꽃물도 어른거린다. 숲은 여전히 지난겨울 색조로 어둑한데, 그 침침한 바탕을 누르고 봄의 꽃물이 번지고 있다. 봄의 숲은 그렇게 옛 흑백사진에 남은 선연한 기억처럼 겨울의 긴 침묵에서 새로운 빛을 길어낸다.

     

  봄바람이 눈과 비를 뿌려주고 지나간 뒤 동생과 나는 며칠 째 마당일을 하고 있다. 집 앞 텃밭의 흙을 뒤집고, 웃자란 나무의 가치도 쳤다. 뒷마당엔 도라지와 참취 씨를 뿌리고, 마당 여러 곳엔 호박씨를 묻어 두었다. 현관 앞 꽃밭도 정리해 마거리트와 팬지 씨를 뿌려두었다. 늘 그렇듯 어설픈 씨 뿌리기라 과연 싹이 돋을까 싶지만 뿌린 씨들은 결국 싹이 돋는다. 당연한 것이라 해도 해마다 경이롭다. 햇볕방에 들여놓은 모종판 씨들도 저마다 자신의 온도와 시간을 찾아 싹을 내밀고 있다. 루꼴라와 옥수수 싹이 제일 먼저 올라왔다. 상추와 바질, 고추 싹이 뒤를 따르고, 다음엔 오이와 가지 싹이 오르고 있다. 들깨 싹이 가장 느려 아직 기척이 없다. 텃밭 대파는 삼월 눈을 헤치고 진즉에 올라왔고, 사월 초엔 부추와 당귀가 뾰족이 고개를 내밀었다. 더위에 강한 작물과 추위에 강한 작물, 식물도 제각각 자신의 성질대로 산다. 동생과 나는 추위에도 더위에도 약하다.

  “얘들은 자기 성질이 확실한데 우리는 왜 어중간할까.”

  모종판 싹에 물을 주며 동생이 말했다.

  “봄바람을 닮았나 보지.”

  “봄바람?”

  “온갖 것이 뒤섞이고, 변덕도 심하고, 종잡을 수도 없고.”

  내가 말했다.

  “뭘 그래. 추위를 몰아내 주니 고마운 봄바람이지.”

  추운 걸 유독 못 참는 동생이 말했다.

  “그게 그 소리지. 달리 말하면 날카로우면서도 온화하고, 소심하면서도 대범하고, 까다롭지만 관대하고, 자기중심적인가 하면 주변을 배려하고.”

  “그러니까 바람도 사람과 다르지 않네. 사람들 보통 그렇잖아. 우리도.”

  동생이 말했다. 우리 자매의 문제라면 그 모든 게 지나쳐서 금방 지치는 데 있다. 그런 사람은 방어력만 강해져 혼자 놀기를 즐긴다. 사월의 바람은 혼자 놀지 않는다. 생각지 못한 폭설도 불러오고 무서운 산불도 일으킨다. 그러다 돌연 달라진 품새로 가만가만 여린 새잎을 내고 꽃들을 포근히 부풀리기도 한다.

  

봄엔 꽃 소식만이 아닌, 오래 연락이 없던 사람에게서 문득 전화가 오기도 한다. 얼굴 본 지는 십 년이 넘었지만 해마다 한두 번은 통화를 하는 어릴 적 친구였다. 작년엔 어째 소식을 거른다 싶었는데 친구는 그동안 말초신경병증이라는 것에 걸렸다고 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려니 온몸이 움직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몸에 면역력이 지나치게 강해 일어난 일이라 했다. 백혈구가 너무 많아 자기 몸의 신경 피막을 공격한다는 이상한 병. 치료를 시작한 지 일 년 정도가 지나, 이제는 한 움큼 먹던 약도 반으로 줄고 일상생활도 어느 정도 한다고 했다. 그동안 친구가 겪었을 두려움과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차마 위로도 못하는 내게 친구는 이제 괜찮다고, 모든 건 결국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큰일을 겪은 자의 단단한 음성이었다. 겪어보지 않은 자의 두려움은 단단해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생각지 않았던 일이 생길 수 있다. 산불이 나서 하루아침 이재민이 되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온몸이 꼼짝 않기도 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그런 소식들은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닥치면 무섭도록 구체적이고 생생해진다. 그런 것을 겪기에 우리는 너무 정교한 감각과 섬세하고 복잡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부당하다. 어떻게 살아도 나이가 드는 것만으로 온몸의 기능은 약해져 간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다시는 몸보다 마음이 중요하던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면 도대체 왜 이런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암담해진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간다는 말이 있다. 비약 같지만 생은 죽음을 향해 전진할 수밖에 없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잠들기 힘든 밤이면 이런 함정 같은 생각에 빠진다. 생 자체가 함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유일한 밧줄은 또 생이어서, 그 생을 부여잡고 기어오를 수밖에 없다. 마침내 기어올라 함정을 벗어나는 순간, 모습만 바꾼 다른 생이 다시 시작된다. 영원히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잠 오지 않는 밤의 굴레이기도 하다.   

     

  무엇이 나를 밤마다 잠 못 들게 하는가, 언젠가 읽었던 책 제목 같기도 한 그 물음이 떠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젊은 날엔 마음에서 답을 찾았던 것이, 이젠 몸에서 찾는다. 얼마 전엔 결국 버스를 타고 도시에 나가 뼈 사진을 찍게 되었다. 무엇이 나를 밤마다 잠 못 들게 하는가, 실체를 보고 싶었다. 단정히 서서 고분고분 사진을 찍었건만 내 속의 뼈들은 다소 불량스러웠다. 선도라도 해야 할 것처럼 삐딱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뼈대를 보며 의사의 설명을 들었다. 불량한 건 뼈들이 아니라 그들을 지지하는 근육이라고 했다. 근력이 약해 허리부터 목까지 뼈들이 무너져 있다는 그런 식의 설명. 도시까지 다니며 치료할 마음을 먹지 못해 그냥 돌아왔다. 이제 치아에도 문제가 생겼다. 하나라도 해결해야지 싶어 지난번 동생을 데려갔던 읍내 치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내 경우는 동생보다 일이 커서 한참, 벚나무에 꽃이 피고 다 지도록 다녀야 할 것 같았다. 올봄, 길가의 벚꽃은 실컷 보게 되었다.

     

  얼마나 멀리 갔기에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 아침엔 창밖을 보던 동생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봄엔 생각도 혼잣말도 의문형이 되는가 싶다. 다시 시작되는 세상이 일순 낯설기도 하고 늘 되풀이된다는 기분도 없잖아, 여러모로 심란한 것이다. 마당에 수컷 고양이 수수가 지나가는 것을 동생은 보고 있었다. 수수를 보자 작년 이맘때 마당을 떠난 고양이 도깨이와 허브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아직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수수도 언제 떠날지 모른다. 봄이면 수컷 고양이들이 사라지는 현상. 호르몬의 변화가 이끄는 대로 간 것이라 해도 무언가 비정하다. 떠난 고양이가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만든 자연의 흐름이 그렇다. 동물도 식물도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포획이란 걸 하고 수술을 시켜 수수를 잡아두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올봄 마당의 암컷 고양이 보리의 중성화 수술로 동생과 갈등이 있었다. 고양이의 삶이 가엽다면 세상의 모든 생명이 다 가엽다. 다른 건 그만두더라도 오직 식육으로 태어나 길러지는 동물들, 공산품처럼 취급되는 그들의 처참함은 어쩔 거냐. 동생에게 말을 꺼내다 접어버렸다. 어쩔 것인가, 동생은 당장 자신이 돌보아온 눈앞의 고양이에 대해 너무나 간절한 것이다. 그 간절함 앞에서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리는 동생의 뜻대로 수술을 하고 보호 중이다. 영문도 모르고 무서운 일을 당하는 녀석을 보는 일도 편치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덜 힘든 삶을 위한 것이라고 나도 생각을 좁히고 있다. 지난 열흘 가량, 조용한 새벽이면 뒷문 너머 구석방에서 보리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동생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별 것 아닌 그 소리에 번번이 마음이 뭉클해졌다. 내겐 동생이 나의 고양이인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 황태 쿠키를 만든 것도 보리보다는 동생 때문이었다. 수술 직후 동생은 보리에게 약을 먹이지 못해 꽤 안달을 했다. 의사가 일러준 대로 주사기를 써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간식에 섞어보기도 했지만, 약 냄새만 맡으면 거품을 문다고 했다. 한동안 고심하여 기껏 생각해낸 것이 라이스페이퍼에 약을 싸는 것이었다. 봉숭아 씨방 같이 생긴 물컹한 보따리가 만들어졌다.

  “이걸 목 안에 쑥 집어넣으면 되지 않을까.”

  동생이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한심했다.

  “너라면 이 수상쩍은 걸 삼킬 마음이 들겠니.”

  내가 말했다.

  “그럼 어떡해. 방법이 없는데.”

  나는 그 보따리를 빼앗았다. 약이 바닥나기 전에 수를 내야 했다. 궁리할 것도 없이 밀가루에 이스트를 넣어 반나절 발효를 시켰다. 경험에 의하면 고양이들은 곡물이 발효된 맛을 좋아했다. 언젠가 연말에 고양이들을 위해 쿠키를 구운 적이 있었다. 오트밀과 고구마, 단호박에다 밀가루를 섞어 발효를 한 뒤 거기에 황태 가루와 김가루를 잔뜩 넣어 구워주었다. 이왕이면 싶어 모양까지 예쁘게 만들어 줄줄이 걸어놓고 쿠키파티를 열었다. 생각보다 고양이들 호응이 대단해서 어찌나 신을 내던지 동생도 나도 덩달아 흥분했다. 황태 가루에 약을 섞어 그때처럼 쿠키를 만들어 주면 보리도 거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예상이 맞아 보리는 항생제가 든 황태쿠키를 잘도 먹었다. 쿠키를 먹으며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환묘복도 벗었다.


이제 마당에 내보내는 일만 남았다. 마침 날도 맑으니 오늘 내보내 볼까 싶다고 동생은 말했다. 보리가 과연 마당에 다시 적응을 잘할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동생도 보리도 최선을 다했다. 힘들었던 수술 과정도 그렇고, 구석방에서의 회복기도 이제 지나갔다. 모든 게 지나간 뒤, 나무를 백 그루 심겠다고 통화를 마치기 전 친구는 말했다. 단단한 말이었다. 나무를 백 그루 심겠다, 그런 말을 하는 친구가 있어 좋았다. 생이 함정이라 해도 나무 백 그루를 심은 그곳은 아름다울 것이었다. 볕이 좋은 날이다. 보리가 나갈 때 마당에 나가 제비꽃이라도 보고 와야겠다.  

  

황태와 김 가루를 넣은 고양이 쿠키
고양이 식당 세 남매 시절 쿠키 따먹기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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