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나무 Sep 17. 2020

그리운 것은 기차를 타고 우물역으로 온다

노란 손수건

진입로 울타리에 세웠던 출입금지 팻말이 없어졌다. 몇 년 동안 햇볕과 비바람에 거의 삭은 것이긴 했지만, 저절로 부서지거나 바람에 날아간 건 아닌 것 같았다. 주변에 잔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고의로 없앤 것일 수도 있다 싶으니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마을 도로에 외부 차량이 많아지고, 산과 들엔 연한 순이 올라오는 철이 되었다. 사람들이 드나들면 흔적이 남는다. 비닐봉지나 목장갑, 음료수병 같은 것들이 버려져 있고 흙도 함부로 파헤쳐져 있다. 작년엔 막 예쁜 새잎을 내던 다래나무가 뭉텅 사라졌다. 적당하게 순이 커지기를 기다리던 두릅도 길 아래쪽은 늘 누군가의 손을 탔다. 화살나무순이며 산초 열매나 취 같은 나물거리도 가장 먹음직할 때 훑어지기 일쑤였다. 근처에 사는 사람은 아닐 것이었다. 마을에서 나물을 한다고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우리 자매 말고는 거의 없다. 이곳에서 산이며 들에 저절로 나는 것들은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농사에 방해되는 잡초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다. 미처 자라기 전에 제초제를 뿌려 녹이기에, 잘 모르는 지역의 들풀을 손대는 건 사실 위험하다.

     

  그런 나물거리야 어쨌든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은 우물 주변의 전선이었다. 비탈 아래 지하수 관정에서 집 마당의 물탱크까지 연결된 센서선이 주변 나무에 허술하게 걸쳐 있는 것이다. 처음엔 전선 호스 속에 넣어져 안전하게 땅속으로 연결되었던 것인데, 언젠가 우물에 문제가 생겼을 때 수리하던 사람이 무리하게 당겨 끊어졌다. 그 뒤 외부에 새로 설치한 선이 그대로 노출되어 나뭇가지에 얹혀 있다. 우리에겐 물과 직결된 더없이 중요한 전선이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잘 띄지도 않을 것이었다. 특히 전선이 있는 우물 주변은 사람들이 산에 오르기에 적당했다. 나무도 듬성했고, 그 위의 산비탈에서 칡을 캐가는 사람이 있어 군데군데 흙이 파인 것이 계단 역할을 했다. 출입금지 팻말을 다시 만들자니 성가신 생각이 들었다. 울타리에 붙였던 팻말이 두 개라 하나는 아직 남아 있기도 했다. 거기엔 ‘특수작물 재배, 출입 엄금’이라 쓰여 있다. 그 팻말을 막 달았을 때 이웃 어르신이 무슨 특수 작물을 키워? 하기에 쑥하고 개망초요, 대답해 함께 웃은 적이 있었다. 우리 집 맞은편 산엔 삼을 파종해 그곳에 들어가기만 해도 벌금을 물어야 한다기에 나도 꾀를 내어 본 것이었다.

     

  출입금지를 내세우는 것에 무언가 떳떳한 기분이 들지 않는 마음도 얼마간 있었다. 땅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인디언식 사고에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새나 고라니가 보기엔 사실 얼마나 이상한 발상일 것인가. 모두가 흙과 물과 바람 속에 태어나 한철을 살다 간다. 그동안 잠시 머물게 되는 공동 터전을 인간들은 팔고 사고 등록을 하는 것이다. 이상한 발상이긴 해도 할 수 없었다. 나도 오래도록 내 땅이 갖고 싶었다. 한적한 시골구석에 컨테이너 하나만 놓여 있어도 그 공간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겹겹이 포개어진 도시의 공간에선 창을 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숲과 허공이 보이는 곳에서 창을 열고, 빗소리를 듣고, 바람을 맞고 싶다는 생각에 병이 날 지경이었다. 결국 언니가 움직여주었다. 남동생도 끌어들였다. 형편이 되는 사람부터 집을 짓고 들어가 나중엔 네 남매가 모두 모여 부모님을 모시고 살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뒤 언니와 땅을 보러 몇 년을 다닌 끝에 이곳이 정착지로 결정되었다. 골짜기를 따라 길쭉한 모양이 그다지 편안한 땅은 아니었지만, 그런 만큼 넉넉한 평수를 살 수 있었다. 언니와 남동생이 먼저 천 평 남짓 되는 밭을 산 뒤, 이듬해엔 그 옆으로 이어지는 낮은 산을 네 남매가 공동 구입했다.

     

  땅을 산 뒤 오 년 가량은 농사를 짓느라 드나들었다. 주말농장 식이었지만 주말마다는 아니고, 봄부터 가을까지 한 달에 한 번 정도 엄마와 네 남매가 모여 작물을 심고 가꾸고 수확을 했다. 그렇게 드나들며 집을 어디에 어떻게 앉힐지 주변을 눈에 익히는 기간은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대지로 변경하기 쉬운 밭에 집을 짓겠다던 계획이, 그 사이 산을 다져 집을 올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골짜기를 따라 경사진 밭은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기상 이변은 더 이상 생경한 말이 아닌 것이다.

     

산지 전용 절차라는 걸 밟기 시작해 건축 준공 완료까지는 이 년 남짓이 걸렸다. 임야를 대지로 변환하는데 각종 복잡한 절차도 무수히 밟아야 했지만, 무엇보다 겉에선 보이지 않던 무연고 무덤이 공사를 하던 중 셋이나 발견되어 기간이 늘어난 것이다. 장의사를 선정해 개장 신고 절차를 밟아 개장 허가를 받기까지 비용도 제법 들었다. 그 뒤로는 지하수 개발과 전기공사, 정화조 준공 같은 일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언니와 함께 산에는 취와 더덕, 참나물 씨를 뿌리고 후미진 곳엔 달래와 미나리와 머위를 구해다 심는 일도 계속했다. 길을 따라 두릅이며 과일나무도 여러 개 꽂아 넣었다. 집이 덩그러니 완성된 그 겨울, 허리가 아파 앓듯이 가만가만 누워 지내며 바라본 창밖의 눈 내리는 풍경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집을 짓고 나서 가장 황홀한 한 때였다. 겨울이 지나 추위가 풀리고 나서는 아주 바빠졌다. 날마다 주변에 어지럽게 널린 공사 잔해를 정리하고, 길 입구엔 울타리를 세워 ‘출입금지’ 팻말도 만들어 붙였다.  

     

  그땐 동생이나 내게 팻말 하나 만드는 따위는 일도 아니었다. 힘이 있어서라기보다 마음이 그랬다. 비탈길 아래 오백 평가량 되는 하우스 밭엔 고추와 호박 농사를 지었고, 비탈길 옆 밭엔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를 심었다. 봄이면 한차례 다녀가는 남동생과 언니의 도움을 받아 가능했던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날마다 밭에 나가 일을 하며 집 꾸미기를 병행했고, 어떻게든 짬을 내어 하루 두 시간가량 길을 걷는 것도 거르지 않았다. 하지만 농사일은 정말 쉬운 게 아니었다. 꾸준히 하다 보면 몸이 단련될 줄 알았는데 늘 허리에 문제가 생겼다. 점점 일을 줄이게 되었다. 삼 년이 지나서는 비탈길 옆의 밭농사를 그만두었고, 작년엔 길 아래 비닐하우스에 짓던 농사를 포기했다. 집 마당의 자그마한 텃밭 정도나 일구며 지내는 요즘엔 고작 팻말 하나 만드는 것에도 꾀가 났다.

     

궁리를 하면 해결책이 생기는 법이다. 손쉬운 방법으로 접착테이프가 떠올랐다. 털을 마구 뿜는 고양이들이 있는 동생 집엔 각종 접착테이프가 구비되어 있었다. 맞춤한 노란색 테이프 하나를 찾아냈다. 그곳에 붉은 네임 펜으로 위험!이라는 글자를 써서 붙이기로 했다. 전선 여러 곳에 부착할 수 있으니 오히려 팻말보다 효과적일 것도 같았다. 바구니에 노란 테이프와 붉은 펜을 담아 우물로 내려갔다. 내가 위험!이라고 써서 테이프를 잘라 건네면 동생이 받아 전선에 붙였다.

“이런 거 말고 시중에서 파는 번듯한 걸 부착해야 통하지 않을까. 이건 좀 얕보일 것 같아.”

동생이 말했다.

“이런 것도 파나? 뭐 검색해보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정색하는 건 좀 야박하지 않아? 이건 그나마 정감이 있잖아.”

내가 말했다.

“정감은 언니에게나 통하는 거고, 세상엔 값을 치르고 산 것이어야 통해.”

동생이 말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 전선이 늘어진 곳마다 노란 테이프가 줄줄이 붙었다.

“꼭 노란 손수건 매달아 놓은 것 같네.”

동생이 말했다.

“아, 그 이야기? 노란 손수건이 나무에 가득 매달리고, 그리운 사람이 기차에서 내리는?”

내가 반색했다.

“그거 괜찮다. 난데없이 여기 기차가 오는 거.”

“그러네. 좋네. 그럼 여기다 기차역 표지판 하나 세우자. 우물역.”

출입금지 팻말은 내키지 않더니 동생이 던져준 이미지 하나에 재미가 생겨 기차역 표지판 만들 생각이 났다. 멋스럽게 만들어 정차역이며 다음 역 이름까지 써넣으면 볼 때마다 기분 좋은 상상이 뻗어갈 것 같았다.

“누가 내리는 걸까?”

내 물음에

“음, 기차에서 내리는 게 사람이 아니었음 좋겠다.”

역시 동생다운 대답이 나왔다.

“사람 아니면 그럼 뭐, 고양이?”

“응. 도깨이와 허브가 괴나리봇짐 하나씩 메고 내리는 거야.”

가볍게 오가던 대화가 잠시 주춤했다.


도깨이와 허브는 작년 봄, 동생이 무척 사랑한 '고양이 식당 삼 남매'의 두 수컷 고양이었다. 암컷 하루는 발정이 나기 전 집에 들여 중성화 수술까지 마쳤다. 세 아이들을 두고 떠났던 어미 모리가 그 무렵 다시 새끼를 배고 마당을 찾아오자 두 녀석은 밥자리를 양보하듯 슬그머니 떠나버렸다. 하지만 모리도 새끼를 낳은 뒤 새로운 고양이 율무에 밀려났다. 지금 고양이 식당에 제대로 자리를 잡아 살고 있는 건 율무네 가족이다. 율무네도 동생에겐 각별해졌지만 한번 가버린 뒤 다시 나타나지 않는 도깨이와 허브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짐짓 모른 척 말을 이었다.

“걔들은 오매불망 기다리는 널 두고 도대체 어딜 가있다 이제 오는 건데?”

“모르지. 제주나 남해? 그런 따뜻한 곳 아닐까."

"기차를 타고 온다는 건 다시 기차를 타고 떠날 수 있다는 거거든."

"괜찮아. 그럼 또 세상 구경 마음껏 하고 오라 응원해 줄 거야. 김밥하고 사이다, 삶은 달걀 봇짐에 챙겨주고."

동생 하곤 길게 말을 말아야 한다.

     

집으로 들어온 뒤 노란 손수건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오래전 읽을 때 그랬듯이 커다란 떡갈나무 가득 노란 손수건이 무수히 매달려 있는 대목은 역시나 뭉클했다. 그런데, 주인공 남자가 타고 오는 건 기차가 아닌 버스였다. 버스정류장 표지판을 만들어야 하나, 잠깐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기차가 마음에 들었다. 노란 손수건 가득 매단  우물역에 날마다 그리운 것이 기차를 타고 당도하는 것이다.

표지판 만들 생각은 이미 사라졌다. 상상은 품이 들지 않아 편하다.

   


이전 09화 무엇이 우리를 잠 못 들게 하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