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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Oct 05. 2020

동생과 길을 걷다

   

올해의 마지막 하루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사람의 약속으로 정해놓은 것일 뿐이지만, 마지막이라는 경계가 있다는 건 좋다. 여기까지야, 라는 한정. 잠시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는 벽처럼 휴식의 느낌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하늘은 맑을 모양이다. 어둠이 물러가는 검푸른 허공이 깊다. 최저 기온은 영하 18도. 며칠 째 혹한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는 동생과 길을 걸었다. 마스크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단단히 옷을 여며 입고 나섰건만,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한낮에도 영하 10도 가까운 기온에 길을 나선 것이 무리이긴 했다. 하지만 동생도 나도 돌아가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생각조차 얼어붙은 것처럼 우리는 묵묵히 걸었다. 바닥이 드러나 보이는 겨울숲이며, 먹줄처럼 선을 긋고 지나가는 허공의 까마귀에도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저 다가오는 길 위에 각자 한발 한발을 옮겨 놓을 뿐이었다. 한참 그렇게 걷다 보니 무언가 개운해지는 맛이 있었다. 잡다한 것들은 다 사라지고 오로지 춥다는 사실과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단순한 바람만이 남아 몸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삼거리의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때때로 멀리서 오는 벗이나 딸 고운비는 이곳 정류장에 내렸다. 집까지 한 시간 남짓한 길을 혼자 걸어오기도 하고, 우리가 마중 나가기도 했다. 걷다 오자, 하면 으레 정류장까지였는데, 추워진 뒤로는 오랜만이었다. 정류장 앞에서 동생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이제 집으로 향해야 했다. 해는 그새 빈 가지로 보송한 겹겹의 산마루에 얹혀 있었고, 산과 산 사이 좁고 길게 난 도로엔 그늘이 지고 있었다.   

  “으, 다시 추워진다. 한참 걸었으면 몸이 풀려야 하는 게 인지상정 아냐?”

  동생이 입을 열었다.

  “ 인지상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넌 뭐 아무 데나 말을 갖다 붙이냐?”  

  마스크 속에서 웅얼웅얼 내가 대꾸했다.  

  “ 아냐?”  

  “인지, 하면 사람인 가질지, 사람이 가진다는 거고, 상정은 일상의 감정, 뭐 그런 것일 테니까 사람이 일반적으로 갖는 생각. 그게 인지상정이겠지.”  

  “그러니까, 대충 맞는 말이구만.”  

  “그래, 대충은.”  

  적합하게 들어맞는 말이라곤 볼 수 없었지만 나는 그냥 수긍했다. 추운 날씨에 따라나선 동생이 기특했고, 말문이 터지자 추위도 좀 덜한 듯 여겨졌다.

  

동생: 에고, 집까지 어떻게 다시 가냐. 너무 멀어.

나: 그래도 가야지 뭐 별 수 있니. 가다 보면 또 금방이니까.  

동생: 먼 것 같은데도 금방이긴 해. 그래서 길을 인생과 같다고 하는 건가 봐.  

 나: 비슷하지. 자기 의지에 따라 여러 갈래의 선택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동생: 다른 점은 없나?

나: 음, 길은 가다 멈출 수 있지만 생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 계속 갈 수밖에 없잖아.

동생: 어째 슬프네.  

나: 슬프긴 하다. 길도 생도. 김훈의 자전거 에세이에 보면 길은 가장 낮고 약한 데로 나는 거라니까. 상처의 흔적처럼. 생도 그렇게 굽이굽이, 상처에서 그 사람만의 무늬가 만들어지잖아.    

동생: 길은 되돌아갈 수 있지만 생은 돌아갈 수 없어.    

나: 오!   

  나는 감탄했다.  

나: 그러네. 근데 되돌아가는 길도 사실은 새로운 길이야. 어떤 것도 되풀이는 없어.  

동생: 오!  

  이번엔 동생이 감탄해 주었다. 서로의 어설픈 말에 곧잘 감탄하는 것은 둘만의 놀이기도 했다. 한참 지껄이며 걷는 동안 길은 훌쩍 사라졌고, 집은 가까워져 있었다.     

동생: 에고, 그리운 우리 집에 다 왔네. 어디를 가도 집이 그립다는 건 참 좋지 않아?  

나: 사람이 그리운 거 보단 낫지.   

  킬킬대며 우리는 울타리를 지나 집으로 오르는 비탈길을 향했다.      

“저 녀석들, 또 기다리고 있어!”  

  비탈 위 마당 입구에선 우리의 절친, 이웃집 강아지 솜사탕과 고양이 율무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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