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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Oct 05. 2020

11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가을 우체국 앞으로 모여든다 

    11월이 되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쉴 수 있을 것 같은 11월. 서랍 앞에 앉고 싶은 달이다. 번잡하고 어설프던 것들을 접어 서랍에 넣는다. 구김을 펴거나 네 귀퉁이를 맞추지 않아도 괜찮다. 서랍을 열고 닫는 정도면 된다. 확실한 무엇 하나 없는 일상에서 정리를 바랄 수는 없다. 언젠가는 괜찮아지고 정리될 것이라 믿고 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괜찮지 않은, 정리될 수 없는 것이 삶인 것을 생각하며 헐거워진 숲을 바라본다.

     

   누군가 11은 겨울 숲의 나무를 닮았다고 했다. 채울 것도 비울 것도 없이 말라가는 11의 나무들로 숲엔 푹신한 바닥이 돋는다. 능선을 따라 몰려온 세상의 색들은 저마다 자신의 마지막 빛을 끌어올린 뒤 골짜기의 깊은 어둠으로 가라앉는다. 밤이면 멀리서 달려온 바람이 사나운 짐승처럼 창을 흔들고, 차갑고 굵은 빗줄기는 남아 있던 숲의 색조를 거둔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세상의 고요가 하얗게 얼어 눈이 내린다. 왜 그런지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 혹독한 추위를 기다리는 마음 같은 게 내 속엔 있다. 막상 추위가 닥치면 고통스러울 뿐일 테지만 내 머릿속 추상의 추위란 그렇듯 하얀 고요함이다.

 

   11월이 되어 마음의 풍경은 이러한데 요즘 우리 자매의 아침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 아침 일곱 시면 집을 나서 숲 고양이 모리에게 밥을 주고 오는 일명 모리 산책으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오래도록 일정한 시각 나타나는 두 존재에 대해 주변 생물체들은 익숙하고도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마당 벼랑 위 낙엽송 꼭대기에 일가를 이룬 까마귀 탑이네가 목청 검은 소리로 가장 먼저 아는 체를 해온다. 산책 시간을 진즉에 꿰고 있는 이웃집 강아지 솜사탕은 말할 것도 없다. 일찌감치 마당으로 와 기다리지 않으면 도로 길목에서 현란하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 우리의 걸음이 채 닿기도 전, 띄엄띄엄 들어선 길가의 집에서는 귀 밝은 닭이며 개들이 연달아 신호를 주고받는다. 숲과 전깃줄을 오가는 크고 작은 새들까지 어쩐지 우리가 지나갈 때 더 소란스럽다. 늘 만나게 되는 차량도 몇 대 있어 운전자는 몰라도 차와는 익숙한 눈인사를 나누고 있다.

     

   어느 날부터는 길에서 항상 마주치는 사람도 생겨났다. 육십 중반 정도의 마른 체구를 가진 남자였다. 동네 사람은 아니고 이웃 마을에서 운동 삼아 걸어오는 모양이었다. 자주 마주치니 목례를 하고 지나가게 되었다. 안개 짙은 아침, 인적 드문 도로에서 낯선 존재를 마주치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사람 곁엔 줄을 매지 않은 진돗개가 따르고 있었다. 크고 단단한 체격에 우리에게 일별도 주지 않는 짱짱한 녀석의 무관심은 멋있었다. 하지만 숲 고양이 모리에게는 꽤나 위협적인 존재인 것이 분명했다. 사실 그즈음부터 모리가 밥자리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남이 거듭되자 날이 춥군요, 하며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다. 개 이름을 물어보았다. 진순이,라고 했다. 사냥을 잘해 고라니를 잡아오기도 하고, 얼마 전엔 고양이를 쫓기도 했다는 말이 이어졌다. 아이고, 싶었다. 아무래도 그 쫓긴 아이가 우리 고양이 같다고, 특별히 밥을 챙겨 주며 아끼고 있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맙게도 진순 아빠는 다음 날부터 진순이를 두고 산책을 나왔다. 수더분한 성품에 동물에 대한 애정을 아는 사람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문제가 또 생겼다. 그 뒤로 진순 아빠가 모리 밥그릇을 살펴 일일이 우리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릇이 비었더라, 사료가 몇 알 남았더라는 식의 전갈이었다. 모습은 잘 보여주지 않는 모리지만 언제 다녀가는지 대개 그릇은 비워져 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모리 입장에서 결코 달가울 게 없는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예민한 녀석이 숲 어딘가에서 보고 있다면 가까이 올 마음이 가실 것 같았다. 결국 모리 산책 시간을 한 시간 늦추기로 했다. 날도 점점 추워지는 시기라 그 편이 우리로서도 나았다.

     

  그 뒤로 아침 8시, 햇살이 막 산마루에 얹힐 때 집을 나섰다. 추위도 덜하고 가을 숲에 조금씩 볕이 스며드는 풍경을 보며 길을 걸으니 좋았다. 시간을 바꾼 첫날 예상대로 진순 아빠와는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엔 기쁘게도 오랜만에 길에서 모리를 만났다. 함께 밥자리까지 가서 또각또각 맛나게도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간 마음 졸였던 것이 한결 풀렸다. 그런데 그때 저만치 마을 쪽에서 누군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노란 조끼를 입고 손수레를 끌며 오는 것이 꽃할머니 같았다.

     

  꽃할머니는 작년에 반장님 집 가까운 도로가에 새로 집을 지어 이사를 왔다. 자그마한 체구로 집 안팎을 오가며 부지런히 청소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처음 한동안은 인사를 건넬 때마다 힐끔 쳐다만 볼 뿐이었다. 쉽사리 열리지 않을 꾹 다문 입에 찌릿한 시선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생흙이 드러났던 어수선한 집 주변은 하루가 다르게 질서가 잡히고 정갈해졌다. 할머니가 가지런하게 일군 마당 텃밭도 이내 풍성해졌고, 도로를 향해 있는 꽃밭에선 항상 새로운 꽃이 피고 졌다. 봉선화며 맨드라미, 접시꽃, 매리골드, 백일홍, 과꽃 따위를 덕분에 실컷 볼 수 있었다. 마을이 예뻐져서 고맙다는 인사를 종종 드렸더니 어느 날부터는 인사도 받고 텃밭 작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이젠 우리가 지나갈 즈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길 때도 있다. 그런 날은 홀로 늙어가는 몸의 힘겨움이며 당신의 살아온 한 대목을 풀고 싶은 날인 것이다.

     

   “어쩌지?”

  모리와 꽃할머니를 번갈아 보며 동생이 곤란한 어조로 말했다. 밥을 채 먹다 말고 모리가 달아날지도 몰랐다. 꽃할머니는 이따금 멈춰 집게로 휴지 조각 따위를 수레에 주워 담고는 다시 움직여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꽃할머니를 향해 마중하듯 걸어갔다. 적당한 거리가 되었을 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우리를 본 할머니는 고개만 끄덕이곤 가던 걸음을 이었다.

   “힘드신데 여기까지 청소하시는 거예요?”

나는 할머니 곁으로 다가들며 말을 붙여보았다. 한번 말문을 열면 내용을 미처 따라가기도 전 당신의 초년이며 중년, 엊그제 일까지 단숨에 엮어 펼치는 분인데, 내키지 않을 땐 입도 벙긋 않는다.

   “아이다, 나도 운동하는 길에… 백지 와 그냥 가겠노. 휴지 쪼가리라도 줍으며 가야지.”

  중얼거리며 할머니가 걸음을 멈췄다.

   “저기, 지금 고양이가 저쪽에서 밥을 먹고 있거든요.”

  나는 모리가 있는 방호벽을 손으로 가리켰다. 할머니 눈길이 내 손끝을 따라왔다.   

  “어디, 저서 괭이가 밥 먹고 있다고?”

  “네. 저어기 연두색 방호벽 있잖아요. 거기 왼쪽 벽 위에서요. 그러니까 좀 멀찍이 지나가 주시면 좋겠는데…….”

  나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니까 내보고 오른쪽 벽에 붙어가라 말이가?”

  “네. 헤헤.”

  동생도 웃으며 끼어들었다. 별다른 대꾸 없이 할머니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집을 향해 얼마간 걸어가던 우리는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방호벽에 다다른 할머니 모습이 보였다. 오른쪽 벽에 어찌나 바짝 붙어 가는지 작은 체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할머니를 만난 다음날은 다시 진순 아빠를 맞닥뜨렸다. 산책 시간을 늦추고 삼일 째 되는 날이었다. 방호벽 기둥 사이 모리 밥그릇에 막 사료를 넣고 있는데 길 끝에 턱 진순 아빠가 보이는 게 아닌가. 동생 입에서 어,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눈에도 보이니?”

  “응.”

  “영문을 모르겠다. 무슨 환상특급 같아.”

  우리가 낮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진순 아빠는 한쪽 팔을 번쩍 들어 반가운 인사를 해왔다. 엉겁결에 나도 팔 하나를 들어 응대했는데, 당황스러운 속내를 숨기자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말 거드는 데는 재주가 없는 동생도 옆에서 웃음만 보태고 있었다. 꽃할머니에게 부탁했듯 밥자리 맞은편 벽 쪽으로 지나가 주십사, 는 말이 웃음 사이 그만 나와 버렸다. 그래도 밥그릇 좀 보지 마시라, 그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다른 애들은 다 잎이 졌는데 어째 얘만 아직 노랗게 남았니. 아, 너무 기운을 뺏더니 어지럽다. 고양이 밥 한번 먹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민망해서 낭만이 싹 가시네.”

  도로가의 은행나무 앞을 지나며 나는 동생에게 말했다. 걸음 빠른 진순 아빠는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낭만이 어딨어. 먹고사는 일에.”

  동생이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바야흐로 11월이잖아.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다 가을 우체국 앞으로 모여들어야 하는 거지.”

  기운 빠진 나는 되는대로 중얼댔다.

  “그건 또 어디서 빌려온 이미지야?”

  기운 남은 동생이 말을 받았다.

  “그런 노래가 어제 라디오에서 나오더라.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걸 듣는데 우리에겐 한때 편지를 쓰고 자전거를 타며 거리를 지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게 떠오르는 거야.”

  “그럼 이따 우리 빨간 우체통이나 열어보시든지. 거기 들어앉은 게 낭만이 아니라 고지서인 게 좀 안됐긴 하지만.”

  동생이 말했다.

 

  며칠이 지났다. 어제도 길에서 진순 아빠를 만났다. 모습을 보이지 않는 모리는 여전히 빈 그릇만 남기고 있다. 사는 일에 정리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모리 산책도 알 수 없는 채로 하루하루 가보는 수밖에 없다. 정리할 것도 확실한 것도 없으니 되는대로 생각도 뻗쳐 본다. 오래도록 의심해 오던, 세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 빚어내는 상상일지도 모른다고.

  오늘 아침엔 어째 길에서 만날 수 없던 진순 아빠가 꽃할머니네 평상에 앉아 있었다.

  “장롱을 좀 옮겨 달래서 왔는데… 뭔 말인지 여서 기다리라네요. 남정네를 바로 들이기가 좀 그렇다나. 참 알 수 없는 노인네여.”

  환상인지 실재인지 진순 아빠가 우리를 보며 은행나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가을 아침, 모리 산책에서 만난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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