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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Sep 12. 2020

가리비는 가리비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 걸까

   보통 일이 아니네.

  나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가리비 껍질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곳의 무언가가 건드려진 것 같은 희미한 진동을 느낄 뿐, 그 말의 진원은 알 수 없었다. 가지런한 부챗살에 꽃물이 번진 것처럼 가리비는 모양도 색도 예뻤다. 누가 고심하여 섬세한 부조로 조각을 해놓은 것도 아니고, 누가 조화를 염두에 두고 칠을 해놓은 것도 아닌데 어찌 이런가 하고, 처음엔 그 겉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감탄에서 시작된 끌림은 그러한 모양과 색을 지니고 오기까지의 여정에 숙연했다가, 이제 빈 껍질을 남기고 사라진 존재의 정처에 이르러서는 막막함에 닿았다.


 얼마 전 도시에 사는 언니가 산골에 사는 동생들에게 먹이고 싶어 보내온 가리비였다. 고마웠지만 갯내를 풍기는 싱싱한 재료는 난감했다. 다행히 내겐 궂은일에 앞장서는 동생이 있었다. “하루키에게 보여줘야지. 엄청 신기해하겠다.” 큰 거부감 없이 가져가더니 한 솥 가득 삶아 왔다. 일부는 양념장에 무치고 한 접시 정도는 치즈와 야채를 얹어 오븐에 구웠다. 냄새도 그렇고 보기에도 근사한 요리가 되었다. 육식을 꺼리지만 언니의 마음을 헤아려 몇 점 맛보고 동생에게 들려 보냈다. 껍질은 한 이틀 채반에 널어 말렸다. 절구에 빻아 텃밭 비료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잘 마른 가리비 껍질을 통에 담는 중에 멈칫, 내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것이다.


  가리비는 가리비 혼자가 아니었다. 껍질 위에 삿갓 모양의 자잘한 조개와 굴이 붙어 있었다. 굴 껍질을 떼어보니 그 속에 까맣게 마른 굴이 보였다. 다닥다닥 붙은 삿갓 속에도 어김없이 속살이 하나씩 얇게 말라 있을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긴 했다. 그런데, 무엇이? 내가 꺼내놓은 말이 물음이 되었다. 스스로 말해 놓고도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조개가 신기한 동생네  하루키와 하루

   냉장고에서 무 하나를 꺼냈다. 바짝 마른 조가비들을 보다 갈증이라도 난 건지 갑자기 시원한 무가 먹고 싶어 졌다. 신문지에 꽁꽁 싸서 야채실에 갈무리해 둔 지 한 달도 더 된 것 같은데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새 잔뿌리가 몇 개 더 나온 것도 같다. 무나 파 같은 작물들은 종이에 싸서 자라던 모양대로 밑뿌리를 아래로 세워 냉장고에 보관하면 쉽게 시들지 않는다. 아주 조금씩 자라나기까지 한다. 아직도 땅속에 있는 걸로 여기는 모양이다. 수세미로 무를 박박 문질러 씻으려니 손가락에 시큰한 통증이 지나간다. 며칠째 열이 나고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있다. 그동안 마늘과 양파를 듬뿍 넣어 죽처럼 질게 한 밥만 먹었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때면 한꺼번에 만들어놓고 약 삼아 먹는데, 참기름을 치고 된장이나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 먹을 만했다. 그래도 이젠 물릴 때가 됐다. 아침엔 욱신거리는 몸을 못 참고 결국 약을 찾아 먹었다. 약은 역시 효과가 빠르다. 한결 살만해지니 입맛도 도나보다. 얼른 무 한쪽을 입에 넣고 싶어 진다. 씻은 무를 도마에서 툭툭 자르고 있으려니 저녁으론 무밥을 해 먹자는 생각이 든다. 힘주어 무를 자르느라 손목이 시큰한데도 기분은 좋아진다. 김이 오르는 구수한 무밥 한 그릇이 벌써 눈앞에 놓인 듯 흐뭇하다. 길쭉하게 자른 무 한 도막을 입에 넣는다. 열 오른 입에서 차가운 무가 아삭아삭 경쾌한 소리를 낸다. 초록빛이 도는 윗부분이라 달큼하다. 기운이 나는 맛이다. 나는 잘라놓은 무 도막을 연이어 입에 넣으며 무채를 썬다.

     

  한동안 바삐 몸을 움직였더니 어느새 무밥이 냄비에서 익어가고 있다. 이제 구운 김을 얇게 가위로 썰어놓고 양념장을 꺼내면 완성이다. 양념장은 가리비 때 넉넉히 만들어 둔 것이 냉장고에 있어 꺼내기만 하면 된다. 밥을 차려놓고 기진맥진 나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는다. 무밥 한 가지를 했을 뿐인데 너무 기력을 소진했다는 기분이다. 이제 무밥이고 뭐고 아무것도 입에 넣기 싫어진다. 좀 전, 옆에 사는 동생에게 무밥 가져가라는 카톡을 보냈다. 동생이 다녀가야 정리된 마음으로 나도 한 술 뜨고 약을 먹을 것인데 얼른 건너오지 않는다. 밖이 어둑해지고 실내엔 한기가 젖은 옷처럼 묵직하다.


  산골에서 사는 일은 생물인 나를 실감하는 생활이다. 기후에 고스란히 영향을 받는다. 나만이 아니라 주위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그렇다. 겨울이 되면 식물은 일찌감치 몸을 움츠려 수분을 날리고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숨어든다. 동물들도 움직임을 줄여 지방질로 몸을 감싸고, 곤충은 살길을 찾아 온갖 틈새로 기어든다. 인간만 살길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곳 생활은 그것을 더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음식을 할 때도 생물로서 생물을 대하는 자세가 나온다. 텃밭에서 왕성하게 자라던 무에 깊숙이 칼을 꽂아 넣을 때면 포식자의 쾌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까지 내 입으로 들어온 그 수많은 생. 나도 언젠가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될 것이다. 동물도 식물도 결국 서로에게 먹이가 된다. 뫼비우스의 띠 같다. 먹고 먹히며 생을 이어가는 일. 무엇이 겉이고 안인지 알 수가 없다.


  동생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 볼멘소리가 나간다. 고양이 밥을 챙기고 청소도 마친 뒤 오는 거라 한다. 나름 바삐 움직였는지 얼굴이 발갛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 걸까.”

  무밥을 보며 흡족해하는 동생에게 케케묵은 물음을 던져본다. 괜한 심통이다. 가리비에 얹혀살던 자잘한 굴과 조개의 잔상이 나를 좀 비관적으로 만든 탓도 있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이 세상이 비극이라는 것은 일찌감치 짐작했다. 물음만 있고 답은 없는 세상이다. 그 속에서 서로 먹고 먹히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결국 슬프지 않은가.

  “하루키 때문이지.”

  내가 애써 차린 밥상을 들고 가며 동생은 쉽게도 답을 날린다. 이미 사라지고 없다. 똑똑한 년. 난 동생이 사라진 문을 향해 말해본다. 보통 일이 아니여. 문이 대꾸한다. 자신의 고양이 하루키에 푹 빠진 뒤로 어떤 심오한 물음에도 동생의 대답은 하루키다. 세상에 태어난 것도, 굳이 이곳 산골에 찾아든 것도 그렇단다.

  “생각해 봐. 우리가 태어나 여기 오지 않았으면 우리 하루키는 그 허름한 창고에서 혼자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겠어.”

  “우리를 낳은 부모님도 그럼 하루키 때문에 태어나신 거네.”

  “바로 그렇지. 생각보다 세상은 치밀해.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설계가 되었던 거라고. 그러니까 고민할 필요 없어.”

  그런 동생에게 비극 따윈 우습다. 고양이 사료만 듬뿍 쟁여 놓으면 다른 골치 아픈 건 없다는 태도다.

     

마당 고양이들

   하루키를 집에 들이고 삼 년이 지나는 사이 집 안팎 고양이가 여섯으로 늘었다. 집안에 둘, 마당에 넷이다. 타고난 천성 탓에 내 근심은 이제 만성이 되었다. 고양이들도 그렇지만, 내 주요 근심은 동생이다. 종일 녀석들 찾아다니며 하루 세 끼 밥 챙기고, 그 밥값 충당한다고 밤낮 영상 편집에도 골몰한다. 그런 동생에게 하루 한두 끼는 차려주어야 나도 마음이 놓인다. 비쩍 마른 애가 도무지 저 스스로는 제대로 된 먹을거리를 챙기지 않으니 할 수 없다. 마요네즈와 간장, 고추장을 반찬으로 아는 애다. 기껏 따끈하게 차려주어도 곧바로 먹지도 않는다. 마당 고양이 한 녀석이라도 안 보이면 산을 뒤져가며 찾아와 먹이고서야 제 밥을 먹는 성미다. 큰 통 가득 사료를 부어 놓고 자유롭게 드나들며 먹도록 하라고 말해보아도 듣질 않는다. 밥 다 먹기를 기다렸다 남은 건 곧바로 치워야 다른 야생동물이 침범하지 않는다고 했다. 맞는 말이긴 하다. 야생동물이 마당을 기웃대면 고양이들에게 위협이 된다. 그러니 애들 다 먹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며 그야말로 집사처럼 시중을 든다. 애들 성향에 맞춰 그릇도, 먹는 자리도 각각 정해놓았다. 일일이 그릇 닦고, 자리 청소하고 뒤처리를 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 시간이 좋다고 한다. 고양이들 또각또각 사료 먹고, 찹찹 물 먹고 하는 건, 아무리 보아도 물리지가 않는다고 했다. 말릴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 그렇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한다는 건, 먹는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다. 기름진 걸 좋아하니 기름은 넉넉히 치고, 간은 이 정도, 하며 만드는 내내 동생을 생각해 손을 놀린다. 그렇게 저를 위해 만든 걸 눈앞에서 맛있게 먹는 꼴을 보면 흐뭇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먹는 꼴 보기는 힘들다. 차려놓으면 틈 날 때 와서 바삐 가져갈 뿐이다. 바빠서 오지 못할 땐 내가 배달도 한다. 가져가서 알뜰히 먹어주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겨야 한다.     

  그러니 동생이 맞다. 왜 사느냐는 물음도, 비극 따위도 우습다. 당장 오늘 한 끼, 동생은 고양이들을, 나는 동생을 먹이면 된다. 그것 이상이 없다. 하루키 때문이라는 싱거운 대답 속엔,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 모두의 살길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가리비 껍질에 붙어 살아가던 굴이며 삿갓조개도 그런 공생의 삶을 살고 있었다. 동생을 기다리는 동안 검색을 해보았다. 굴이며 삿갓조개는 이동이 용이치 않아 재빠르게 움직이는 가리비에 붙어산다고 했다. 가리비의 입장에선 껍질에 잔뜩 매단 울퉁불퉁 조가비들 덕에 천적으로부터 보호받는 면이 있지 않았을까. 내가 또 이렇다. 가리비처럼 내 비관도 비관 혼자만이 아니어서 그 속에 낙관이 함께 산다. 수월치 않은 삶에 오늘 하루 무탈한 것이 어디냐고. 식탁에 다가가 이제 내 몫의 무밥 앞에 앉는다. 잠시 쉬었더니 다시 먹을 생각이 난다.


가리비 치즈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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