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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Sep 12. 2020

오늘은 버섯구이를 먹자

내기를 즐기는 동생과 같이 살려면 심장 관리가 우선이다

   아침 10시가 좀 넘은 시각, 이웃에서 버섯 농사를 짓는 정호섭 씨가 전화를 했다. 전원생활 잡지를 주겠다는 것. 통화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비탈길을 오르는 차 소리가 들려왔다. 집 가까운 곳에서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마당으론 이미 파란색 트럭이 들어서고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을 미처 갈아입을 틈이 없었다. 광목으로 헐렁하게 만들어 입은 것이라 얼핏 부대 자루처럼 보이는 옷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벽에 걸린 앞치마를 낚아채 위에 걸치고 풍성한 목도리 하나를 목에 감았다. 함께 있던 동생은 어느새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없었다. 동생 꼴도 만만치 않아서 짧은 앞머리를 이마 위에 바짝 동여맨 분수머리에 수면 잠옷이라 부르는 털북숭이 옷을 입고 있었다. 아침 이맘때면 동생과 나는 주로 그런 모양새로 만나 느긋하게 커피와 함께 잡담을 즐겼다. 누군가 그 시각에 찾아와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일이란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문을 열어주러 나갔다. 세수도 않고 머리도 빗지 못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럴 땐 오히려 제대로 모양을 갖춘 사람처럼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게 나았다.  

    


  정호섭 씨는 잡지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나는 얼른 인사부터 했다. 만날 때면 늘 얼마간 멋쩍은 듯 내외를 하다 어느새 사라지는 정호섭 씨라 차분하게 인사를 건넬 새가 없었다. 이곳에 온 초기엔 아차, 하는 순간에 가버리고 말아 내 몫의 인사를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곤 했다. 역시나 오늘도 정호섭 씨는 전원생활 두 권과 함께 버섯 한 봉지를 건네더니 바삐 돌아서려는 기색을 보였다.

  “아, 지난번 책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버섯까지 주시고.”

  나는 빠르게 말했다. 정호섭 씨는 느리게 몇 마디 했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뭐, 네, 네. 추운데 어떻게.’ 정도였다. 늘 반쯤은 짐작만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지금 커피 마시던 중이었는데 한잔 드릴까요?”

  그에게 말해보았다.

  “아, 커피요?”

  정호섭 씨는 머뭇거렸다. 생각지 못한 제안을 받은 표정이었다. 아직은 모를 일이었다. 번번이 비슷한 표정이지만 두 번 중 한 번은 들어오는 편이다. 나로서는 그가 들어와 내가 대접하는 차라도 한잔 들고 가야 마음이 좋았다. 이곳에 정착하기까지 정호섭 씨의 도움이 많았다. 재배하는 여러 작물도 간간이 나눠주어 얻어먹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처지라 늘 미안하고 조금은 빚진 마음인 것이다.

  “아, 장작을 저렇게 … 그러니까, 겨우내 난로만 때고 지내시는 거예요?”

  햇볕방에 쌓인 장작을 보며 정호섭 씨가 말했다.

  “네. 지낼 만해요.”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얼마간 펴며 내가 말했다. 난롯불이 한창 타고 있는 집안은 후끈해서 더울 지경인데 집 앞 햇볕방은 아직 해가 들지 않아 꽤 추웠다.

  “참, 대단해요, 여자분들이.”

  그 말을 하고 그는 돌아섰다. 오늘은 그냥 가는 쪽인 모양이었다. 내 꼴을 생각하면 다행이긴 했다.

  “책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의 등 뒤에 대고 나는 큰 소리로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트럭이 가는 걸 지켜보다 집으로 들어오는데 빙긋,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에 나눈 난로에 대한 대화는 겨울이면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거의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이곳에 온 지 여섯 해가 되었지만 우리와 알고 지내는 마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몇 해 전인가 나눠준 지역 소식지에 각 마을 현황이 나와 있었다. 우리 마을엔 집이 이십여 호, 주민은 마흔 남짓이었다. 해마다 집을 짓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한둘은 있으니 조금은 더 늘었을 것이다. 집은 도로가를 따라 지어진 몇 채 말고는 대부분 숲과 숲 사이, 보이지 않는 곳에 들어앉아 있었다. 일부러 찾아가기 전에는 누가 어디에 사는지 알기가 힘들었다. 우리와 안면이 있는 사람은 주로 도로가 주변 집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동생과 내가 운동 삼아 도로를 걷는 중에 가끔 인사를 하게 되어 얼굴을 익힌 것이다. 그중 붉은 벽돌집 어르신과 정호섭 씨 내외가 거리상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다. 정호섭 씨 내외와는 나이도 비슷하여 왕래가 있는 편인데, 한 해에 열 번은 넘지 않았다. 내외가 동반하여 오는 경우는 또 드물어서 두 사람이 각각 따로 오는 것을 합한 횟수가 그 정도다.

     

  정호섭 씨가 주고 간 잡지는 전원생활 10월호와 12월호였다. 농민 단체 어딘가 가입해 있어 그곳에서 보내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정호섭 씨가 챙겨 준 것이 열댓 권이나 모였다. 멋스러운 집과 제철 재료로 차린 음식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고 읽을거리도 알차서 좋았다. 집이 막 완성되었을 때 정호섭 씨 부부를 초대해 식사 대접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책장에 가득 꽂힌 책을 보더니 “아, 책을 좋아하시는구나.” 몇 번인가 혼잣말을 했다. 그 뒤로 이따금 농민신문사에서 나온 잡지며 책자들이 있으면 챙겨 주었다. 줄 때마다 약간 주저하듯 “이런 것도 읽어요?” 묻더니 언젠가부터 그 말은 사라졌다. 이젠 제법 편한 사이가 된 것이다. 지난번 준 책자는 ‘고추재배 기술서’다. 보통 잡지보다 크고 빳빳한 종이에 선명한 고추로 가득한, 꽤나 두껍고 무거운 그 책을 잠 안 오는 밤에 읽었다. 이야기가 있는 책보다는 수면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생각보다 고추재배는 흥미로웠고, 내가 모르던 고추 품종이 어찌나 많은지 놀라울 정도였다. 너무나 다채로운 고추의 생김새와 색에 홀려 결국 잠은 아주 달아나버렸다. 날이 막 밝아 올 무렵, 나는 온라인 종묘상에 들어가 보라색 노란색 고추 씨앗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금방 가셨네.”

  뒷문으로 나갔던 동생이 앞쪽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차하면 인사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분수 머리엔 뜨개 모자를 눌러쓰고 옷도 갈아입고 있었다. 얄미운 동생. 늘 곤란한 상황엔 살짝 빠져버린다. 대꾸 없이 잡지를 후루룩 넘겨보고 있으려니 “날도 덜 추운데 걷고 올까?” 웬일로 먼저 걷자는 제안을 했다. 그 정도 성의면 단박에 기분이 풀리고도 남았다. 길에 나섰다. 얼마 걷지 않아 정호섭 씨 파란 트럭이 가볍게 경적을 울리며 우리를 지나갔다. 둘 다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자주 보아야 더 반가운 법이다. 차번호를 이참에 단단히 새겨두었다. 마침 반장 댁 앞을 지나는 중이라 내친김에 그 집 마당에 보이는 파란색 트럭 번호도 외웠다. 차번호를 알아두어야 엉뚱한 차에다 인사를 않게 된다. 시골에선 거의 집집마다 흰색이거나 파란색 1톤 트럭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동생 말대로 그다지 춥지 않은 날씨였다. 하얀 구름 몇 조각이 가장자리에 떠가는 하늘은 푸른빛이 선명했고, 겹겹의 산등성이엔 환한 볕이 부드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걷는 동안 몸이 점점 누긋해졌다. 마음도 통통 가벼워졌다.

  “우리 차번호는 알아?”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동생이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럴 수가. 영락없이 맹한 자매다. 나는 그렇다 치고 동생은 자기가 운전하면서도 차번호를 모르다니. 그나마 나는 도시에 살 때엔 차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잊어버린 것일까. 이곳에선 차를 사용하는 일이 드물고 부근에 같은 차량도 없어, 굳이 번호를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라고 변명해 보지만 한심한 일이었다.

  “어, 생각날 것 같으면서도 정말 모르겠네. 그럼 누가 먼저 기억해내나 내기하자.”

  동생이 뭐 재미난 거리라도 생긴 듯 말했다. 내기, 그것은 동생이 내게서 뭔가 우려먹고 싶을 때 즐겨 들이대는 짓거리인 만큼 나로선 달가울 게 없었다. 소소한 주전부리에서 아끼던 옷가지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내기로 건너간 것들이 적지 않았다. 걸려들지 않으려 버텼지만 결국 동생의 집요한 강요에 장작 하나를 걸었다. 장작 정도야 아까울 게 없다고 나름 머리를 굴린 것이다.

  “에계, 장작 하나로 무슨 내기를 해.”

  영 마뜩잖아하더니 내기의 재미를 포기 못한 동생은 결국 타협했다. 대신 그중 잘생긴 놈을 골라가겠단다.

 뭐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만 속이 헛헛해지는 게 아닌가. 말이란 이렇게 약간의 이미지만 입혀도 생생한 힘을 가진다. 마치 늠름하고 잘생긴 장작 하나가 이미 내 품을 빠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허전한 것이,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내기는 시작되었다. 나는 춘향전의 한 대목인 양, 우리 차의 앞태며 뒤태를 다정한 마음으로 그려보기 시작했다. 가을 은행잎처럼 어여쁜 노란 빛깔에 뭉툭하니 귀여운 우리 차. 새삼 차에 대한 애정이 솟구쳤다. 차가 서 있는 광경을 가만히 떠올린 뒤, 트렁크 아래의 번호판으로 조심조심 시선을 옮겼다. 아슬아슬 번호 네 개가 떠오르고 있었다. 앞의 두 개는 선명했고, 뒤의 둘은 어사무사했다. 아주 조금만 더 초점이 모아지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애타는 그 순간, 얌통머리 없게도 동생이 냉큼 네 자리 숫자를 맞춰버리는 게 아닌가. 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자신 없이 함부로 내기를 거는 동생이 아닌 것이다. 저것이 이미 생각난 뒤에 내기를 건 것은 아닐까, 심중에 의심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이 난 동생이 연이어 한글로 된 글자 하나와 그 앞 두 자릿수까지 깡그리 기억해내면서 나는 도리 없이 의심을 주저앉혔다. 이미 떠나간 것엔 빨리 마음을 접는 것만이 수였다.

 

  삼거리에서 돌아오는 길엔 새로운 내기가 시작되었다. 다가오는 설날 부모님께 가는 일을 의논하던 중이었다. 출발하는 당일, 차 시동이 걸리지 않거나 하면 어쩌나, 그런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요즘 들어 이틀에 한 번씩 시동을 걸고는 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명절이라도 긴급출동은 오겠지. 그보다는 그사이 눈이 안 와야 할 텐데.”

  내가 말했다.

  “모르지. 예보를 보면 내일부턴 날이 좀 흐릴 건가 봐. 언제처럼 폭설이 내려 발이 묶일 수도 있어. 한동안 서울에 가려고만 하면 일이 생기는 편이었잖아. 지난 추석엔 그래서 못 갔지. 근데 그런 걸 뭐라고 하더라? 왜 소풍날 꼭 비 오고 그런 거.”   동생이 말했다. 그렇게 또 내기는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장작을 걸었다. 장작을 되찾고 싶은 열망이 앞서서인지 흔하게 쓰는 말 같은데도 쉽게 생각나지는 않았다. 자칫 잘생긴 장작을 또 하나 뺏기게 될지도 몰랐다.

  “말 붙이지 마.”

  동생과 되도록 멀리 떨어져 걸으며 나는 머릿속을 조였다. 뇌 속에서 엔진이 공회전을 하는 느낌이었다. 생각하려 할수록 머릿속엔 연기만 가득 찼다. 괴로울 지경이었다. 까짓것 장작 두 개다, 느슨하게 마음먹으려 애썼다. 하지만 집 입구에 다다르자 애가 탔다. 집 마당에 도착할 때까지만 내기는 유효하다고 미리 정해 놓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이젠 장작이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 날 듯 말 듯 한 말처럼 약 오르는 게 또 있을까. 최후의 방법으로 머릿속에 자판을 깔았다. 신속하게 예문을 만들었다. ‘소풍날만 되면 비가 온다. 그런 ***가 있어요.’ 순간, 긴장이 탁 풀렸다. 상상의 손가락이 매끄럽게 자판 위를 달려 건져낸 말, 징크스! 목을 콱 틀어막고 있던 그 말이 튀어나오자 비로소 숨이 트이고 살 것 같았다.

이래서 내가 내기를 질색하는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에 이렇게 심장이 조이는 짓을 왜 한단 말인가. 내기뿐 아니라 아주 간단한 게임 같은 것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 놀이공원에 가도 놀이기구에 올라 탈 생각 같은 건 없던 아이였다. 보통 사람보다 심장이 물렁한 것일까. 아, 그러고 보니 버섯이 기다리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 고마운 정호섭 씨. 심장엔 버섯이 좋다. 이젠 어서 집에 들어가 향긋하고 졸깃한 버섯구이를 만들어야겠다. 양파와 당근도 곁들여 굽고 맛깔난 양념장도 만드는 거다. 모름지기 내기를 즐기는 동생과 같이 살려면 장작, 아니 심장 관리가 우선이다. 집으로 들어가는데 문 옆에 보기 좋게 쌓아둔 내 장작더미에 절로 눈이 갔다. 이놈도 저놈도 하나같이 잘나 보이는 것이, 아이고야 싶었다. 이제 이 아까운 놈들을 어찌 땔 것인가. 그래도 입춘이 멀지 않았다.

     

햇볕방의 잘 생긴 장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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