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울 Apr 17. 2024

부부싸움은 결혼을 결심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I may be wrong

신혼 초에 부부가 많이 싸운다는 말이 있다. 두 사람이 한 집에 살게 되면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서로의 다름을 마주하게 되고,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 싸움은 결혼을 결심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부모의 간섭이 없어도, 돈 때문이 아니어도, 그와 나는 종종 부딪혔다. 연애 상대였을 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도 결혼 상대가 되면서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커졌고, 그러다 보면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버렸다. 나의 불안은 남편에게 쉽게 전이되었고, 미래의 일까지 앞당겨 재단당하는 것이 억울해진 그도 덩달아 감정이 격해지곤 했다.


그중 나의 불안을 가장 많이 자극했던 건 남편이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선이었다. 우리는 연애 때부터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눴던 대부분의 토론은 즐거웠다. 하지만 유독 사회 문제에 대한 주제만 나오면 부정적으로 말하는 그가 종종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 또한 한 때 언론인을 꿈꿨던 한 사람으로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바라보는 남편은 비판을 넘어 사회를 불신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경쟁으로 병들어 가고 있는데, 세금은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다.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정치인들은 잇속 챙기는데 여념이 없고, 그들을 견제해야 할 언론은 혐오를 양산하며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따라서 이 나라는 망해가고 있고, 출산율과 자살률 등의 수많은 통계지표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런 냉소적인 태도를 계속 마주하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낭비되는 세금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들도 하나씩 생기고 있고, 보이지 않을 뿐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묵묵히 일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한 소셜 미디어의 발전 방향이 양극화를 강화시키고 있는 건 맞지만, 혐오를 양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언론인은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문제가 많다면, 그 속에서 내가 기여할 점을 찾아야지, 방구석에서 손가락질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하에 나는 그가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라치면 “꼭 그렇게 냉소적으로 볼 필요는 없지 않냐” 하며 그가 하는 모든 비판을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문제의식에 대해선 쉽사리 인정해주지 않은 채, 자신을 극단적인 사람으로 내모는 것을 못내 서운해했다. 그렇게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쯤 되면 싸움의 발단은 중요치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상대방이 왜 잘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그는 그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어 했고, 나는 그런 그를 바꾸고 싶어 했다.


공방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한 건, 싸움을 대하는 우리 둘만의 규칙 같은 게 생기면서부터였다.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싸우다가도 스스로 잘못한 점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을 바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듣다 보니 그건 내가 잘못한 게 맞는 거 같아. 그 점은 사과하도록 할게


잘못에 대한 즉각적인 인정이 싸움의 소강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데 확실히 도움은 되었다.


싸움이 잦아든 건 분명했다. 하지만 싸움이 사라질 순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냉소적인 태도가 종종 거슬렸고, 방식만 바뀌었을 뿐 그를 바꾸기 위한 나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카운터 펀치’에서 ‘잽’으로 바뀌었달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이 ‘잽’, 다시 말해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라는 인식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를 바꾸고자 하는 나의 노력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냉소’가 그다지 도움 되지 않는 건 사실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책을 읽다가 무릎을 쳤다. 이 책이라면, 냉소로 둘러쌓은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매달리면, 어떤 경험이나 배움도 우리에게 스며들 수 없게 되어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더 높은 지혜에 도달하고 싶다면, 신념과 확신을 살짝 내려놓고 우리가 사실을 그다지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좀 더 익숙해져야 합니다.’

‘내려놓기는 어쩌면 제가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일 겁니다. 내려놓기의 지혜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얻는 것은 끝이 없지요. 우리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하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부르는 생각들은 내려놓는 순간 힘을 잃습니다. 설사 그 생각이 ‘옳다’ 하더라도요. 물론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생각이 결국엔 우리에게 가장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들여다보길 바랍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중 에서


나는 즉시 거실에 있던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곤 그에게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너무 흥미롭다며, 그도 함께 읽었으면 싶은 페이지를 줄줄 읽어주었다.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책을 통해 작가가 하는 말이었다. 내가 느낀 깨달음을 그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에게 돌아온 건 그의 날 선 반응이었다.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 틀릴 수도 있어.”


당혹스러움이 몰려왔다. 어쩌면 이렇게 좋은 말에 조차 냉소적일 수 있단 말인가. 순간 우리 사이에도 냉기가 돌았다. 이런 냉기는 대부분 큰 싸움으로 이어지곤 했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책의 좋은 구절을 오빠한테 소개해주고 싶었던 건데, 꼭 그렇게 받아쳐야겠어?”


이대로 몇 마디 더 이어지면, 우리는 분명  또 목소리가 커질 거고, 서로가 맞다며 싸우게 되겠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됐어. 나 혼자 보고 말지.”


횅하니 방에 들어온 나는 침대에 앉아 베개에 등을 받치고 다시 책을 펼쳤다. 더 이상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한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반응할 건 뭐람. 에잇, 이런 책이 다 뭔 소용이야. 정작 책을 읽어야 할 사람이 보질 않는데. 나는 책을 다시 덮고는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리곤 옆에 있던 스마트폰을 집어드는데, 책의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맞다. 내가 틀릴 수도 있겠다. 그를 냉소적이라고 이미 단정 해놓고, 바뀌어야 한다고 여겼던 나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스친 순간, 조금 전 그가 맞받아 쳤다고 느꼈던 말이 달리 보였다. 그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명제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상대가 바뀌기를 바라는 의도를 가지고 말했던 나의 태도를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남편이 나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를 존중하지 않는 나의 태도에 이미 기분이 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방에 들어와 버렸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짱구를 굴리고 있는데, 남편이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기분이 상한 건 본인인데, 되려 내가 기분 나쁘다며 방에 들어가 버렸으니 그도 황당했을 것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말한 건 그게 아니라..”


“알아. 생각해 봤는데, 오빠 말이 맞을 수도 있겠어. 내가 의도를 가지고 오빠에게 그 책을 읽어준 것 같아. 그건 오빠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였어. 사과할게.”


나의 사과와 함께 우리 사이에 흘렀던 냉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한바탕 싸움까지도 각오하고 방에 들어온 그 또한 달라진 기류를 느끼고는 곧장 누그러졌다. 숱한 싸움을 해왔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기류가 바뀐 건 처음이었다.


“사과해 줘서 고마워. 벼울이가 오랫동안 나의 냉소적인 태도에 대해 지적을 해왔고, 나도 그게 쌓여있다 보니 순간 서운함이 올라와서 날카롭게 받아쳤던 것 같아. 나도 그 점은 사과할게.”


그리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벼울이가 지속적으로 말해왔기도 했지만, 나도 나의 냉소적인 태도를 고쳐야겠다고 느껴왔고, 최근 가족톡방에서도 비판만을 위한 기사 공유를 자제하겠다고 선언했었거든. 나는 나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벼울이가 그렇게 또 지적하니까 더 서운 했던 것 같아.”


“엥? 전혀 몰랐어. 가족톡방에 스스로 그런 선언을 했다고?! 너무 기특한 걸! 오빠가 나한테 그 이야길 해줬다면, 아마 그렇게 책을 대놓고 읽어주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 거야. 그나저나 오빠 이야길 들으니 기분이 너무 좋은데?”


“말할 기회가 없었어. 갑자기 이야길 꺼내는 것도 우습긴 하잖아? 하지만 마침 기회가 되었으니 말할게. 여하튼 나도 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벼울이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만약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깨닫고 그에게 곧장 사과하지 않았다면, 그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아마 평소처럼 대차게 싸우면서 서로에게 생채기나 내고 있었겠지. 상대가 변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스스로의 깨달음도 있겠지만, 상대가 변할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나부터 변하는 게 먼저 일 수 있겠구나. 그러다 보면 상대의 변화를 이렇게 갑작스레 발견하기도 하는구나. 또 하나 배운다. 물론 한 번의 배움으로 우리 사이의 싸움이 완전히 사라질 순 없겠지. 그래도 그날, 우리는 화해의 기술을 하나 더 늘렸다.

이전 06화 시어머니가 주례는 목사님이 해주시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