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울 Mar 12. 2024

칠 남매 장남은 연애부터 힘들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돈, 그 야멸찬 관계성

그의 이야기


그는 칠 남매 장남이었다. 12살 차이의 막냇동생을 포함하여 아홉 식구가 한 집에 살았다. 달린 입에 비해 수입은 턱없이 부족했다. 어려서부터 ‘나만의 공간’ 따위는 꿈꿔본 적도 없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7명의 남매가 각각 방을 나눠 갖기 위해선 최소 7개의 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저택에 살 형편은 못 되었다. 가족이 많다고 집주인에게 쫓겨나기 일쑤였는데, 저택은 무슨. 나만의 공간 따위 없어도 그저 안정적인 집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스무 살 무렵, 아버지마저 아프시기 시작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는 절망했고, 한동안 방황했다. 하지만, 그 방황조차 그에게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절망이 여섯 동생들에겐 더 큰 절망으로 다가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공부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24살, 늦은 나이에 대학에 갔지만, 대학에 갔다고 갑자기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것도, 없던 돈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돈이 많을수록 좋은 대학에 올 확률이 높아지는 거였구나.’ 그는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학창 시절 반에선 많이 볼 수 없었던, 잘 사는 친구들이 발에 치이게 많았다. 대학 등록금은 물론 용돈까지 받으며 다니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외활동, 어학연수 같은 좋은 스펙을 쌓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원이 필요했다. 주변 대학생들에겐 당연히 여겨지는 것들이었지만, 그에겐 그 모든 것이 사치였다. 학교생활을 소화하기에도 충분히 벅찼다. 남들은 스펙에 스펙을 더하는 시간을, 그는 아르바이트와 과외로 가득 채워야 했다. 친구들과 학생 식당이 아닌 주변 가게들로 나가는 것조차 부담이라 혼자 먹기 다반사였다. 그런 그에게 대학 시절의 풋풋한 연애 따위가 자리 잡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졸업 후 돌아가신 아버지의 염원이기도 했던 장교 생활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정기적인 수입이 생겼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그만의 공간도 생겼다. BOQ라고 불리는 독신 장교 숙소였는데, 다섯 평짜리의 방 하나, 화장실 하나의 작은 원룸이었다. 그는 그 공간이 참 좋았었다고 했다.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에어컨이 주는 쾌적함을 특히 좋아했었다. 깨작깨작 돈을 모아 갖고 싶었던 카메라도 중고로 마련했다. 집에 갈 때마다 동생들 먹일 치킨을 잔뜩 사 가는 것이 그에겐 행복이었다. 수입은 적었지만 혼자만의 공간에서 취미생활도 조금씩 할 수 있던 그 시간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여전히 그는 연애에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익숙해지고, 익숙함이 때때로 지겨움으로 변해갈 때쯤 그는 그제야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용기 내 나가게 된 소개팅 자리에서 그는 또 다른 장벽을 마주해야 했다. 그에겐 소개팅 자리에서 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었다는 것.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여행조차 가본 적 없었고, 맛집 탐방 같은 소소한 취미조차 즐길 돈이 없었다는 것이 이렇게 엉뚱한 데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처음 본 사람에게 지난한 개인사를 털어놓으며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이 죽일 놈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욕할 순 없지 않은가.


‘아, 나는 소개팅으로 사람을 만나긴 글렀다.’ 몇 번의 소개팅 끝에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려버렸다고 했다. 마음속 한구석에선 스스로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 올라오는 외로움 때문에 연애를 위한 노력을 하기엔 혼자만의 시간이 충분히 좋았다. 온종일 영화관에서 5~6편 영화만 봐도, 밤새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과거를 이해해 주기 바랄 필요가 없었다. ‘혼자 살고 말지, 뭐…’


그즈음 장교 생활은 끝났고 그만의 공간도 다시 사라졌다. 늦은 대학 입학에 이어 군 장교까지 하고 나니, 어느새 서른이 넘어버렸다. 그는 그렇게 서른한 살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블라인드 채용은 그의 늦은 나이를 가려줬다. 하지만 그나마 하나 있었던, 그의 노력으로 얻어낸 대학의 네임벨류 마저 지워버렸다. 스펙 하나 없이 학교생활로 가득한 자소서. 그는 이것을 들고 승부를 봐야 했다. 다시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다.


그렇게 1년, 드디어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여름, 회사 연수원에서 그와 내가 만났다.




우리의 이야기


팀장이었던 나는 연수원에서 팀의 화합을 명목으로 3주간 거의 매일 뒤풀이 시간을 마련하곤 했는데, 초반에 그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마음을 천천히 여는 그의 성격 탓도 있었지만, 사진·영상 담당이라 매일 저녁 편집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화합의 장을 마련했고, 덕분에 그도 서서히 얼굴을 내비칠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불쑥 자신이 칠 남매를 가졌다고 고백한 건, 수많은 뒤풀이 날들 중 어느 날이었다. 이 시대에도 칠 남매가 있다니! 모두 놀라 그를 쳐다보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그중 장남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장남이라고?

와… 오빠 결혼하기 힘들겠다…!


지금 생각하면 무례하기 그지없는 말을 나는 툭 하고 내뱉고 말았다. 그는 내가 편견이 없는 탓이라고 감싸곤 하지만, 내가 제일 잘 안다. 배려가 없었다.


맞아. 쉽지 않을 것 같아. 나도 별생각 없기도 하고.


나중에야 들었지만, 당시 그는 이미 이성에게 큰 관심이 없는 상태였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쩌면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있는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거리낌 없이 말했노라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린 서로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랬던 우리가 서로에게 처음 매력을 느낀 건 4개월이나 지난 어느 겨울날이었다. 우리 팀은 그 후로도 종종 같이 여행을 다니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연수가 끝나고도 활발한 단체 채팅방을 유지하는 유일한 팀이 되어있었다. 그날 우리의 만남도 바로 이 채팅방에서 시작됐다.


그날은 이전에 함께 연극을 하던 지인이 이태원에 작은 와인바를 열어, 내가 술을 팔아주겠다고 큰 마음을 먹고 간 날이었다. 나의 지갑 사정도 그다지 여유롭진 않았지만, 왜인지 그 지인을 응원하고 싶은 탓에 와인부터 안주까지 무리하게 주문을 해댔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문은 넣었고, 사장님은 바빴고, 음식과 술은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 채팅방에 말을 꺼냈던 것이었다.


“이태원 올 싸람?”


저마다 자신이 바쁜 저녁을 보내고 있다고 말하는 사이, 신촌 방향으로 올라가던 그가 대답했다.


“신촌 홍대 인근에서 불렀으면 갔을 텐데 ㅎㅎㅎ”

“(신촌에서) 이태원 짱 가깝다 오빠?”

“멀던데”


장난스럽게 대답한 그가 톡을 덧붙이기도 전, 다른 동기들이 장난 삼아 말들을 보탰다. 너무한다. 엎어지면 코 닿는데 안가네. 나였으면 갔다. 마음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인 듯 등등. 올 생각이 없는 동기들의 허황된 말장난을 보며 웃고 있는데, 개인 톡이 ‘까똑’하고 울렸다.


“길게는 못 가도 들를 수는 있는데, 가? 방해하는 거 아니고?”


그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서둘러 가게 주소를 보냈다. 그제야 문득, 단 둘이 보는 건 오늘이 처음 아닌가? 어색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휴.. 다행이다. 마주 보는 테이블은 아니군.’


어색할까 걱정했던 순간이 무색하게, 그와의 자리는 금방 편해졌다. 일찍 가야 한다고 했던 그도 그날의 자리가 즐거웠는지, 오래도록 함께 있어 주었다. 그날 했던 대화가 모두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 와중에 딱 하나, 뚜렷하게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꿈’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제 막 직장을 자리 잡은 우리가 어쩌다 꿈에 대해 이야길 하기 시작했는진 몰라도, 내가 그의 꿈 이야기에 끌렸던 건 분명하다.


“보통 가난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유혹에 노출돼. 가난했던 나 또한 발 한번 삐끗하면 망가진 삶을 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항상 해왔거든. 난 티끌 하나 차이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가난 속에서도 우리 칠 남매를 어떻게든 교육시켰던 어머니 덕이지. 그런데 그런 좋은 어머니를 가진다는 건 순전히 운이야. 난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그런 어머니조차 가지지 못한 더럽게도 운이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싶어”


그날의 대화는 지금껏 내가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에 대해 돌아보게 했다. 그와 동시에 당연하지 않은 환경에서 티끌 하나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나아가 더 큰 꿈을 꾸고 있는 그가 참 멋지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토록 대화가 잘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살면서 가장 큰돈을 한 번의 술자리에 써버린 그날, 나는 값비쌌던 그의 마음도 함께 샀다. 내 인생 최고의 소비였다.


단 둘이 처음 만난 그날, 그가 남겨두었던 사진


이전 01화 결혼? 언젠가 할 수도 있겠지, 좋은 사람 만나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