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매매부터 인테리어까지
결혼을 하기 위해선 마음에 걸리는 게 없어야 된다. 걸리는 게 없는 결혼은 뻥 뚫린 고속도로 마냥 쉽고 빠르게 진행된다. 우리가 그러했다. 우리에게 있어 결혼 준비의 시작은 부동산이었다. 일단은 함께 살 곳이 있어야 결혼이든 뭐든 할 것 아닌가. 우리는 데이트할 때마다 부동산에 대해 토론도 하고, 때로는 집을 보러 다녔다. 회사에서 쓸법한 협업툴을 같이 쓰면서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고 공유하는 것이 우리 둘만의 놀이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소위 ‘영끌족’이 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끌족. 2020년 즈음 있었던 부동산 폭등 시기, 영혼을 끌어모아 집을 마련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하우스 푸어’가 있다. 영끌족이 이슈가 되면서 수많은 미디어에서는 너도나도 영끌족의 키워드를 끌어다 자극적으로 편집하고, 반복 생산해 냈다. 누가 더 자극적으로 표현하는지는 각양각색이었지만,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는 일관되는 듯 보였다. 무리한 투기를 후회하고 허덕이며 두세 개쯤의 부업을 하는 모습, 혹은 부부의 경우 서로를 탓하며 갈등이 극에 달한 모습 등.
영끌족에게도 다양한 사연과 사정이 있을 것이다. 미디어에서 이야기하듯 정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우리는 영끌을 후회하지 않았다. 많은 대화 끝에 결정한 우리의 선택이었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무겁게 느낀 적도 없었다. 빚도 착실히 갚아나가고 있다. 우리에게 집은 단순히 투기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내 남자 친구였던 그는 한 번도 ‘내 집’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형제가 많은 대가족이었던 터라, 자기 방조차 가져본 적 없었음은 물론, 가족 수가 많다고 살던 집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의 집엔 항상 집주인이라는 존재가 있었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불안정한 곳이었다. (이에 대해선 ‘칠 남매 장남은 연애부터 힘들다’에 더 자세히 쓰여있다.) 그는 ‘내 집’으로 안정을 찾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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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나에게 집은 자산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2000년대 초반, 부모님은 학군지로의 이사를 결정했었다. 아빠가 하시던 사업도 확장이 필요했던 시점이라, 전세와 매매의 기로에 놓였고, 부모님은 전세를 택하셨다. 이에 대해 엄마는 두고두고 아쉬워하셨는데, 당시 전세와 매매의 가격 차이가 3~4천만 원 밖에 나지 않았었고, 자금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집값이 급하게 오르는 모양새에 겁이 나 섣불리 집을 구매하지 못하셨단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3억 하던 집이 20억으로 오르는 동안, 전세였던 우리 집은 점점 좁아졌고, 궁극엔 서울 밖으로 밀려났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인플레이션을 체감했고, 현금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도 처음부터 집을 살 생각은 없었다. 다만, 청년부터 신혼부부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정책을 샅샅이 뒤져도, 모아둔 자산이 없는 흙수저 맞벌이 신혼부부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없었다. 우리는 안정적인 소득을 얻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 왔지만, 모든 복지혜택은 부모의 재력보다 개인의 노력에 패널티를 주는 걸 더 당연시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 부모에게 상속받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2020년 초여름, 우리는 시장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는 목표로 관심을 가질만한 부동산의 범위를 좁혀 지속해서 살펴보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오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당시는 막 부동산 공부에 발을 떼었을 때라 선뜻 구매로 이어가진 못했다. 그렇게 한 번의 파도를 놓치게 되었다.
여름이 지나고 날씨가 선선해질 무렵 다시 부동산 시장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때쯤엔 이전에 봤던 매물들은 이미 예산을 넘어서 있었다. 경기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각자의 직장을 고려해 새롭게 보기 시작한 곳이 한 재개발 지역이었다. ‘2030 도시기본계획’ 같은 각종 토지 계획 보고서까지 살펴보면서 우리는 점점 확신에 차올랐다. 여름에 한 번 매수 타이밍을 놓치고 나니, 이번에는 꼭 잡아야 할 것만 같았다.
우리의 조급함은 너무 쉽게 들키고 말았다. 초보 매수자였던 우리는 공인중개사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갈대처럼 흔들렸다. 직접 집을 보고 나니, 내 집이 생긴다는 설렘이 눈앞을 가려 단점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당장 다음 사람이 계약을 할지 모른다는 공인중개사의 말에 우리는 덜컥 300만 원의 가계약금을 보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빠한테 말씀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인생의 큰 결정을 할 때마다 아빠에게 상의드리곤 했었는데, 이번 일 만큼은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빚을 내서 집을 사는 것에 대한 아빠의 부정적인 생각에 정면으로 반하기 쉽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가계약금을 걸었다는 딸의 폭탄 발언에 아빠는 크게 화를 내셨다. 이렇게 큰 결정을 하는 동안 당신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서운하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서운함도 잠시, 이미 가계약금을 보냈다는 현실을 다시 자각하는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으셨다. 아빠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지신 것 같았다.
“승철(가명)이 아저씨 알지? 그 양반도 그렇고, 저기 어디서 부동산 관련 사업을 크게 하는 아빠 친구도, 김 박사도 그렇고, 다들 너희 칭찬을 하더라. 집을 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힘을 모아서 알아서 갚겠다는데 그게 왜 문제냐,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왜 앞길을 막느냐 하더라. 아빠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그래도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고, 너희 생각도 그렇다니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빠가 하나 제안을 하자.”
갑작스러운 딸의 선택이 염려되셔서 아빠가 발 빠르게 주변 친구분들께 전화를 돌리신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태세 전환에 놀라고 있을 때 아빠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요지는 지금 가계약을 건 집의 계약을 무르고, 신도시의 소형평수를 알아보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우리가 선택한 지역이 재개발이 확정된 건 맞고, 앞으로도 더 발전할 지역이긴 하지만, 신혼부부가 실거주하면서 애도 키울 생각을 하면 신도시의 인프라가 훨씬 좋지 않겠냐는 친구분의 조언이 있었다. 당장 내일모레 계약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가보고 결정하자고 합의했다. 막연히 신도시는 너무 비싸지 않을까 하여 우리의 후보지에도 넣지 못했던 곳이었다. 다음날 나는 퇴근하자마자 버스에 몸을 실었다. 회사가 그곳에서 더 가까웠던 그는 먼저 부동산에 들러 집을 이미 보고 있었고, 나는 조금 더 느지막이 도착했다. 초행길이라 서툴렀는지, 하필이면 버스를 한 정거장 더 지나쳐 내려 그 동네를 걷게 되었는데, 그 길 끝에 그를 만나자마자 나는 말했다. “우리 300만 원을 버리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에 살자!”
살기 너무 좋은 곳이었다. 도로는 정돈되어 있었고, 큰 아파트 단지들로 이뤄진 동네에 유흥시설 하나 없이 한적했다. 오래된 큰 나무들이 울창한 산책길이 아파트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옆엔 천도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투자 관점에서 부동산을 공부해 왔대도, 결국 실거주를 해야 하는 입장이 살기 좋아 보이는 곳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300만 원을 날렸다.
하지만, 스터디 비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가파르게 오르던 매수세에 우리가 마음에 들었던 매물의 집주인은 눈앞에서 천만 원을 올렸고, 세입자의 이사비까지 부담해야 팔겠다고 버티기 시작했다.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이 집에도 다음 매수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우리는 또 한 번 흔들렸다. 쉽게 흔들리는 우리와 달리 신도시에만 14채의 집을 가지고 있다는 29년생 집주인 할머니는 완고했다. 눈물 어린 새댁의 사정에도 흔들림 없이 원하는 바를 요구했다. 백억 자산가도 한 줌의 재산이 아쉽구나. 또 한 번 눈물을 머금고, 두 번째 계약금을 보냈다.
그렇게 우리 집이 생겼다. 두 번의 예상치 못한 아픔을 만회하기 위해 인테리어만큼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고자 노력했다. 인테리어의 전 과정을 공부했고, 모든 공정을 꼼꼼히 관리했다. 30년간 한 번도 고치지 않은 듯해 보이는 옥색의 싱크대와 알루미늄 새시, 안 그래도 좁은 집을 더 좁아 보이게 만드는 거실 문을 포함하여 벽에 붙어있는 모든 것들을 철거했다. 전망이 좋던 발코니는 거실과 단차를 맞춰 홈카페로 꾸미고, 폴딩도어를 달았다. 맞춤 가구를 최대한 활용하여 부족한 수납공간을 충분히 만들었다. 작은 방에 있던 작은 창고는 화장대로 개조하였다. 콘센트 위치 또한 가전 위치를 고려하여 최대한 선이 보이지 않도록 조정하였다. 문선은 최대한 얇게, 트렌드를 따랐다. 거실로 통하는 문을 지탱하던 벽은 개방감을 주기 위해 철거하고 싶었지만, 내력벽이라 철거가 어려웠다. 대신 아치스타일로 만들어 디자인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싱크대 벽타일을 포함한 모든 타일은 최대한 크기를 키워 개방감을 주었고, 가구들을 포함하여 벽지와 필름지는 모두 화이트로 맞춰 화이트 인테리어를 완성했다. 열다섯 평의 낡은 소형 아파트는 어느새 작지만 볕이 잘 들고, 전망이 너무 좋은 아늑한 우리만의 집이 되어 있었다.
남자 친구와 함께 카페를 전전하며 공부하던 것으로 시작으로 덜컥 가계약을 걸고, 또 그 계약을 파기하고, 다시 새로운 지역에서 계약하고, 인테리어를 완성한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계약의 무게가 무거워 운전면허시험장에서 갑작스레 엉엉 울었던 날도 있었고, 눈앞에서 천만 원에 이사비용까지 뜯어가고 마는 욕심 많은 할머니가 원망스러워 회사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친 날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잔금을 치른 날 밤, 빈 집 거실에서, 편의점에서 가져온 과자 박스를 깔고 앉아 함께 맥주 한 캔 마신 날도 있었고, 어느 동네에서 살아갈지 즐거운 상상을 하며 데이트하던 많은 날들이 있었다. 그 모든 순간을 오롯이 서로를 의지하며 지나왔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영혼을 끌어모아 집을 마련하는 동안, 크고 작은 선택과 고난 속에서 우리는 부부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