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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Oct 30. 2022

진짜 엄마가 된 날.

엄마 인생 1년 차- 죽을 만큼 아팠지만 목숨보다 소중해!

 2009년 5월 23일, 나는 진짜 엄마가 되었다.


 당시 큰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호주로 오신 엄마는 예정일이 열흘이 지나도록 손주가 나오지 않아 애가 타던 참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은 정해졌는데 산후조리를 해줄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니 엄마도 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초초한 마음을 뒤로한 채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난 밤이었다. 엄마와 침대에 누워 한국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을 보면서 깔깔깔 웃고 있는데 갑자기 풍선이 뽀드득하며 서로 마찰되는듯한 그런 느낌이 아랫배에서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이건 뭔가 이상하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아래쪽에서 뜨거운 물이 줄줄 새기 시작했다. 양수가 터진 것이었다! 이후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고 그렇게 진짜 엄마가 되는 관문이 시작되었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전개였다.




 급하게 병원으로 향하는 차에서 숨도 못 쉴 정도의 진통이 몇 분 간격으로 찾아왔다. 병원에 도착해서 수속을 밟고는 진통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내진을 했는데 자궁문이 얼마 열리지 않았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이렇게 아픈데 다시 집에 가라니! 더 큰 고통이 찾아올 거라는 두려움과 의료진의 도움 없이 혼자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나의 걱정은 아랑곳할 것 없이 산파(호주는 산부인과 전문 간호사인 Midwife들이 모든 분만 과정을 관장한다.)는 진통제를 먹으며 진통 간격이 더 줄어들면 다시 병원에 연락하고 오라고 했다. 단호한 호주 사람들의 업무방식을 알기에 하는 수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병원 문 앞에서 다시 찾아온 어마어마한 진통에 결국 나는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안될 것 같아 다시 분만실로 들어갔는데 신기하게도 자궁문이 좀 더 열려있었다. 다행히 다시 입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분만준비가 시작되었다. 하늘이 엄마인 나를 도우셨다!




 진통은 내가 출산 후기에서 글로 간접 경험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아픔이었다. 내 경우 누가 곡괭이 같은 걸로 자궁벽을 마구 긁어대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섭게 몰아치는 고통에 틈틈이 연습했던 라마즈 호흡이나 마사지 같은 것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생각이 났던 한 단어가 'Epidural', 바로 무통주사였다. 진통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면서도 선배맘들이 조언해준 대로 무통주사를 놔달라며 또박또박 말했다. 평소 바늘을 엄청나게 무서워하는 나지만 척추에 마취 바늘이 꼽히는데 아픈 줄도 몰랐다. 마취약이 투여되자 신기하게도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잠잠해졌다. 하지만 무통의 위력으로 찾아왔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기 상태를 체크하는 기계에 계속 알림이 울려댔기 때문이다. 아기 심박수가 떨어지다 보니 원인을 더 정확하게 체크하기 위해 바늘이 달린 관이 아기 머리 쪽에 연결이 되었다. 위급상황이 아니면 찾아오지 않는 의사가 나를 보며 아기가 힘들어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때부터 나에겐 아이가 최우선이었다.




 의사는 무통을 제거하고 분만을 빠르게 진행시켜 아기를 빨리 꺼내 자고 했다. 진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면서도 아기를 위해 다시 찾아올 고통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죽도록 아픈 상황에서도 아기의 안위가 먼저였던 나는 그렇게 내 안의 모성을 꺼내보게 되었다. 역시 무통의 위력이 줄어들자 숨도 못 쉴 정도의 고통이 빠르게 간격을 좁히며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기의 상태에 계속 문제가 생기자 의사는 조금 더 기다려보고 응급 제왕절개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뭐든 아기만 건강하다면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제왕절개도 수술이다 보니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 스물일곱이었던 어린 나는 아이를 위해서만은 용감했다. 다행히 그사이 자궁문이 아기를 만날만큼 열렸고 아직 내려오지 않은 아기는 의사가 흡입기로 머리를 잡아 끄집어내겠다고 했다. 의사의 지시로 몇 번의 힘을 주었고 세 번째 밀어내기에 드디어 아이를 만났다. 내 인생 가장 뜨거운 만남이었다!




 나오자마자 내 배 위에 올려진 뜨거운 아기를 향해 나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했다. 혹시라도 아기가 잘못될까 봐 걱정했던 마음이 아기에 대한 미안함으로 찾아왔던 것 같다. 옆에서 보던 엄마도 눈물을 흘리며 고생했다고 했다. 그때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엄마의 모성과 나의 모성을 동시에 느꼈던 그 순간이 사진처럼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있다. 이후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자꾸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기에게 바로 젖을 물려야 병실로 이동할 수 있다는 간호사의 지시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내 품에서 버둥대는 아기를 꼭 안고 있으면서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한참을 애썼다. 결국 몇 시간 뒤 나는 점점 회복하기 시작했고 자세를 고쳐 앉은 다음 겨우 아기에게 젖을 물릴 수 있었다. 한 시간이 넘게 엄마젖을 찾아댔던 아기는 나의 도움으로 힘차게 젖을 빨아댔다. 1리터 넘게 피를 흘렸음에도 내가 괜찮다는 사실보다 아이가 젖을 빨게 된 것이 더 기뻤다.




 네 아이들과의 만남이 다 소중하지만 첫아이를 만났을 때처럼 신기하고 새롭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진짜 엄마가 된 이날은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죽을 것같이 고통스럽던 상황을 참아냈던 것도, 그 속에서 내가 아닌 아기의 안위가 먼 저였던 것도 내가 처음 경험한 모성의 신비였다. 이후 나는 세 번 더 엄마의 위대함을 경험했다. 둘째 때는 집에서 최대한 기다리다가 3-4분 간격의 진통을 할 때쯤 병원으로 출발했다. 중간에 맥도널드에 들러 좋아하는 피시 버거 세트를 살 정도로 여유 있었다. 셋째 때는 바쁜 남편에게 괜찮다며 거짓말을 한 뒤 집에서 혼자 진통을 했고 병원도 친구에게 연락해서 차를 얹어 타고 갔다. 남편은 셋째 출산 30분 전에 병실에 도착했고 다행히 아이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다. 넷째 때는 유도분만 예약이 잡혀 병실로 들어가서는 간호사가 양수를 터트렸고 바로 무통주사를 맞는 바람에 진통도 없이 소리 한번 안 지르고 아이를 낳았다. 경험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살면서 느끼는 특별한 경험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모성애인 것 같다. 내 어머니에게 느꼈던 모성을 엄마가 되어 내 자식한테 갖게 되니 부모님을 좀 더 이해하고 예전보다 더 감사하게 되었다. 부모가 되지 않았다면 평생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아이를 낳은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은 알지 못했던 용기 있는 나의 모습도 보게 되었다. 가끔 뉴스에서 나오는 의인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너무나도 대단하고 나와는 별개의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적어도 내 아이에게만은 큼은 나도 용기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아이에게뿐만 아니라 일이나 사회생활을 할 때 좀 더 당차게 바뀐 것 같다. '목숨 걸고 아이도 낳았는데 내가 이거 하나 못할까?'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 맞섰다. 용기 있게 엄마가 되었고 덕분에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다. 

싸이월드가 또렷하게 기억하게 해 준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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