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인생 1년 차- 참을忍을 가슴속에 3만 개는 써보았다.
네 명의 신생아를 키우며 가장 많이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극한의 상황 속에서 최대한 참는 것이다. 아이의 첫 한 달을 함께하는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많이 포기해야 한다. 마치 남자들이 군대를 가기 전 신병교육대에 가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제시간에 먹고 잘 수 있는 훈련병들이 나을 수도 있다. 엄마들은 이 한 달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마음 편하게 씻고 볼일을 볼 수도 없다. 그나마 이 한 달이 지나야 몸도 어느 정도 회복을 하고 엄마의 역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게 된다. 아이의 수유 텀이나 수면습관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신생아를 키우는 한 달 동안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는 것으로 모든 표현을 하는 아기를 이론이 아닌 동물적 감각에 의존하며 돌보아야 한다. 육아 인생의 서슬 퍼런 교육 시절인 것이다.
나는 정말 잠이, 특히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다. 지금도 아침을 먹는 시간 대신 잠자는 게 좋을 정도로 말이다. 큰아이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부터 대식가였다. 그런 아이에게 소화가 잘 되는 모유로만 영양을 공급하니 금세 배가 고파진 아이는 한두 시간마다 일어나 젖을 물었고 새벽에 더 자주 깼다. 첫 손주를 처음 안아본 그날부터 본인 품에 들어온 아기를 내려놓는 법이 없었던 엄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실 정도였다. 아마 더 오래 산후조리를 하셨더라면 천사 같은 손주에게 정나미가 떨어지셨을 수도 있다. 모두가 곤히 잠든 새벽 아이의 울음소리에 눈도 못 뜨며 일어나 젖을 물리다니.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을. 수능시험을 볼 때도 틀릴까 봐 걱정하기보다는 늦잠을 잘 까 봐 걱정하던 나였는데 말이다. 예민하고 잠이 없는 넷째를 키우는 지금도 잠과의 전쟁은 진행 중이다.
잠을 못 자는 것도 모자라 제대로 먹기도 힘들었다. 지금도 배가 고프면 엄청 예민하고 잘 참지 못하는 나이다. 그런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엄마젖을 찾는 아기 때문에 밥을 먹다가도 아기가 울면 바로 수저를 놓고 가슴팍을 풀었다. 아기 배를 채우고 돌아서면 차게 식거나 불어있는 식사를 물릴 때가 많았다. 결국 첫아이 임신 때 20킬로가 넘게 쪘던 살은 아이 백일 때 몸무게 앞자리가 4가 될 정도로 빠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이후 처음 만나보는 몸무게 앞자리였다. 둘째 때는 그래도 경험이 있어서인지 아이 젖을 물리며 밥을 먹는 기술도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편하게 앉아서 천천히 골고루 먹는 식사는 할 수 없었다. 영양은 늘 부족했고 당연히 체력의 한계를 매 순간 절감했다.
더군다나 나는 산후조리라는 것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 호주는 한국처럼 산후조리 문화가 없다 보니 조리원도 없거니와 산모도우미도 많지 않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나와 남편의 몫이었다. 첫째 때는 아이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엄마가 2주도 채 못 있다 가셨고 둘째 때부터는 한국에서 친정엄마 지원군도 초빙하지 못했다. 가족도 친척도 없는 타지에서 아기를 낳다 보니 아이가 낮잠을 잘 때는 빨래나 집안 정리를 하느라 바빴다. 둘째를 낳았을 때는 두 살인 큰아이를 키우며 혼자서 신생아까지 돌보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혹독한 시기를 보냈던 것 같다. 그래도 셋째 때는 오빠들이 학교와 어린이집을 다녀 그나마 여유 있게 아이를 돌보았다. 융통성 있게 아이 젖을 물리며 휴대전화로 책도 읽고 간간이 스트레칭도 하며 나를 돌볼 수 있었다. 코로나 베이비였던 넷째 때는 정말 고립된 집 안에서 신생아 포함 아이 넷을 돌보며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세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를 도와주어 버틸 수 있었다. 다 살게 마련이라는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잠과 배고픔을 이겨내고 젖 냄새와 땀냄새가 뒤섞인 몸으로 생리현상도 제대로 해결하기 힘들었던 시절. 언제 깰지 모르고 왜 우는지 알 수 없는 예측불가 시한폭탄인 아기와 24시간 육아전쟁상황에 대치하며 참는 법 하나는 제대로 훈련한 것 같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가진 군인들처럼 내 아이를 길러야 한다는 일념 하나였다. 물론 남편도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육아에서, 특히 아기의 신생아 시절에서 엄마인 나의 역할이 큰 건 사실이었다. 오롯이 나를 위하는 일에도 이렇게까지 몸과 마음을 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아이가 원동력이 되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나도 엄마는 엄마인가 보다.
네 번이나 그 혹한기를 경험해서인지 엄마가 되기 전의 나보다는 잘 참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육아가 아닌 다른 상황에서도 인내심을 발휘하게 되었다. 워킹맘인 지금 해야 할 일이 많을 때는 잠을 줄이고 끼니를 거를 때가 많다. 수면욕과 식욕을 참아내는 것은 물론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운 상황들도 시간의 흐름에 맡기려 할 때가 많다. 나의 인내가 네 아이를 성장시키는데 한몫을 했듯이 회사도 덕분에 잘 자랐다. 그래도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참는 일이 억지로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것보다 훨씬 보람되고 값지게 느껴진다. 다시 신생아 시절의 아기를 키우라면 이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말이다.
엄마성장보고서: 신생아를 키울 때는 어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