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도로가 꽉 찼다. 여기까지 읽으면 한국에서도 흔한 교통체증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흔한 교통체증이 아니다. 도로에는 각종 자동차는 물론이고, 사람이 끄는 인력거, 자전거로 끄는 뚝뚝, 도로 중앙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소들, 저마다 속도가 다른 사람들의 무리들이 어디가 앞으로 향하는 방향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뒤엉켜있었다. 도무지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가이드의 이끔에 따라 타고오던 자동차에서 내려 자전거가 끄는 뚝뚝으로 갈아탄 참이었는데, 그 이유를 어렴풋이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동차로는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움직이기도 어려울 것 같은 복잡한 도로 사정 때문인 것 같았는데, 뚝뚝을 타고 있는 우리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아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외지인의 기우일 뿐이었다. 도대체 질서나 규칙이라곤 없어보이는 도로에서 우리의 기사님은 신기하리만큼 요리 조리 잘 빠져나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갠지스강 이었다.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서는 아르띠(Arti, Aarti, Arati, Arathi 등으로 다양하게 쓰여짐)라고하는 종교 의식을 치른다. 흰두교의 시바신에게 바치는 제사로 브라만 사제들에 의해 매일밤 진행되는데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강가의 제단에서 강을 바라보고 진행되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은 보트를 빌려서 강에서 이 의식을 바라본다. 우리도 이 제사를 구경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강 근처에서 뚝뚝에서 내린 우리는 여전히 복잡한 도로에서 행여 일행을 놓치기라도 할까 손과 팔을 서로서로 꼭 붙잡고 가이드 뒤꽁무늬만 바라보며 따라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강가까지는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은데 가이드가 멈춰선다. 놀란 눈을 하고 가이드를 바라보자 인도에서 유명한 짜이티를 한 잔 마시고 가잔다. 짜이는 홍차에 우유, 설탕, 생강 또는 향신료를 넣어 만든 차로 우리가 흔히 보는 밀크티에 인도의 향신료를 추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에서 반드시 먹어 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지만 이토록 복잡한 도로에서 먹을 줄은 몰랐다. 도로 한 쪽에는 짜이티를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이 중간 중간 있었는데 각자 작은 공간에 자리잡고 앉아 차가 가득 담긴 커다란 통을 앞에 놓고 소주 잔 보다 약간 큰 잔에 능숙한 손놀림으로 담아 팔고 있었다.
‘이 정신없는 곳에서 차를 마신다고?’
다소 어리둥절해하며 한 잔씩 받아든 우리는 주춤하며 한입씩 마시기 시작했고, 이내 그 맛에 눈이 반짝였다. 그 이후 우리는 인도 일정이 끝날 때까지 매일 짜이티를 마셨다. 대부분 이렇게 복잡한 도로위에서 팔고 있는 차로 말이다. 어쩐지 이게 진짜인 것 같아서.
그렇게 우여곡절끝에 강가에 도착한 우리는 보트를 빌려탔다. 아르띠 뿌자 시작까지는 시간이 좀 남은 덕에 보트를 타고 강을 둘러볼 수 있었다. 갠지스강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화장 장면도 멀리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가까이 가자면 갈 수 있었겠지만 그 경건함과 의미를 존중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문화를 마주하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듯하여 멀리서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후에 네팔을 방문했을 때 조금 더 준비된 마음으로 그들 문화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었다.
화장시에 가족들이 준비한 돈 만큼의 장작을 제공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가는 길에는 더 큰 불이 타오르고 누군가가 가는 길에는 다소 작은 불길이 타오르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외지인의 눈에 비친 것이고, 현지 가이드의 말로는 각자의 사정에 맞게 화장비를 내고, 그것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같은 양의 장작을 제공한다고 한다. 어떤 것이 ‘진실’ 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지 가이드가 말한 것이 그들의 ‘진심’이라 믿는다.
날이 어둑해졌을 때 우리는 소원을 비는 디아(Diya)를 갠지스강에 띄웠다. 디아는 꽃과 초가 담겨진 작은 접시로 신이 좋아하는 꽃을 갠지스 강에 띄우며 소원을 빌면 신이 그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나는 여행지에서 소원을 빌때 거의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이라고 빈다. 혹여나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다가 빼먹는 사람이 있으면 안되니까, 그렇다고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라고 했다가 혹여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내가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행운까지 모두 가져가면 안되니까, ‘내가 좋아하는 모든 이들’의 행복을 빈다. 그리고 모든 신들이 다소 이기적인 내 소원을 매번 들어줬다고 믿는다. 갠지스강에서 내 꽃을 받은 신도 들어줬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보트는 아르띠를 보러 갔다. 아니나 다를까 어마어마한 숫자의 크기도 모양도 다양한 보트들이 모여들었다. 도로에서와 마찬가지로 질서도 규칙도 없다. 각자 알아서 자리를 잡는 것이다. 보트를 타고 있다보니 사람들간의 거리가 유지될 수 있어서 어느 자리에 있어도 시야의 가림 없이 볼 수 있었다. 다만 길고 좁은 보트들이 앞,뒤 할 것 없이 지그재그로 톱니바퀴처럼 엉켜있어서 나중에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얼마간 구경을 마친 우리 일행은 빠듯한 일정에 지쳐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좌,우,앞,뒤 어느 하나 빠져나갈 곳 없이 꽉 찬 보트들을 보니 감히 돌아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우리를 본 가이드는 돌아가고 싶냐고 먼저 물어주었다. 우리는 그렇기는 하지만 보트들이 많아서 끝날때까지 있어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이드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가자며 보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 보트가 움직이자 주변 보트들이 망설임도 없이 빠르게 길을 터주었다.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도 알 수 없고 그나마도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렇게 무사히 빠져나오며 알았다. ‘질서’나 ‘규칙’은 정해진 것이 아님을. ‘질서’나 ‘규칙’은 약속일 뿐, 단 하나의 방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불규칙해 보여도 그것에 모두 동의하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갈 방식을 찾았다면 그것이 ‘질서’인 것이다. 무질서해보이는 도로에서도 우리는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고, 심지어 그 안에서 차도 한 잔 마실 수 있었다. 그 거리에 있던 모두는 그러한 방식에 ‘동의’한 것이다. 복잡한듯 보였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고, 그 규칙에 따라 끼어들고, 양보하기를 실천했던 것이다. 강의 보트들 역시 원하는 곳에 자리잡아 아르띠를 구경하지만 누구라도 자리를 뜨고 싶으면 주위의 보트들이 길을 터준다. 이것은 단순한 ‘동의’를 넘어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이다. 귀찮다거나 짜증나는 일이 아니라 누구라도 먼저 자리를 뜰 수 있고, 그것이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주변의 누구도 주저함없이 기꺼이 자신의 보트를 움직여 길을 내어준다.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질서’나 ‘규칙’이 결국은 함께 살아가기 위함이라는 것에 초점을 둔다면 누군가의 잣대로 그것이 ‘질서’다 ‘무질서’다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은 함께살아간다는 목적을 이루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나는 ‘이렇게 무질서한 곳이 또 있을까’라고 생각한 곳에서 ‘질서가 무엇인가’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