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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털복숭이 Oct 04. 2021

birth and death

그 날의 기억

2019. 9. 25. 무슨 요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침 7시를 조금 넘겨 꿀댕이가 태어났다.

전날 저녁 양수가 터졌고 밤을 넘겨 새벽까지 진통을 하다가 아기의 심박수가 떨어져서 결국 내 배를 가르고 꿀댕이를 만났다.

진통은 몇 시간동안 했는데 수술실에 들어간 후 10분만에 아기가 나왔다.

출생의 순간이었다.


꿀댕이는 무럭무럭 자라 이제 두 돌을 맞이할 참이었다.

올해는 추석이랑 시기가 겹쳐 진짜 생일을 하기도 전에 양가에서 한 번씩 생일파티를 했다.

양가의 첫 손주이자 아직까지 유일한 손주인 꿀댕이는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진짜 생일엔 무얼 해야하지.

2021. 9. 25. 토요일.

남편이 오전에 약속이 있기도 하고 추석연휴가 막 끝난 주말이라 어디 멀리 갈 에너지도 없어서, 우리끼리 케이크에 촛불이나 불고 꿀댕이가 좋아하는 고기랑 생선 구워서 밥이나 먹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날을 위해 꿀댕이가 요즘 애정하는 페파피그 피규어케이크도 특별히 주문해 두었다.

그래도 뭔가 좀 더 특별한 게 없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외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이었다.

할머니는 오래 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계시는데, 최근 몇 달간 병세가 악화되어서 얼마전에도 한 차례 고비를 넘긴 터였다.

지난 크리스마스때까지만 해도 휠체어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며 요양원 간호사분들과 같이 사진도 찍을 정도로 괜찮으셨는데, 음식물을 자발적으로 넘기지 못해서 콧줄식사를 하시게 된 6개월 전부터 많이 안좋아지신 것 같았다.

코로나 때문에 할머니를 만난지도 오래되어서 안타까움은 곱절이 되었다.


할머니가 갑자기 보고싶어져 핸드폰의 갤러리를 열어 할머니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사진마저 할머니가 아프셨을 때의 모습밖에 없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건강하셨을 때의 모습을 보고싶은데.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할머니와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아주 어렸을 적,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가족이 해운대로 이사를 가기 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길 하나를 옆에 두고 아주 가까이 살았다.

주말이면 할머니집에 놀러갔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한데, 나와 여동생은 토요일이 되면 할머니집으로 놀러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아침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교회로 가는 스케쥴을 오랜 기간 반복했다.

우리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 날은 마치 주중에 열심히 다이어트를 한 사람에게 단 하루 허락된 치팅데이 같은 그런 날이기 때문이었다. 보물찾기를 하는 것 마냥 푸우의 꿀단지를 찾듯 달콤하고 부드러운 간식거리를 찾아 냉장고와 창고를 뒤지는 것을 시작으로, 신문의 텔레비전 편성표를 펼쳐놓고 그 날 볼 프로그램을 동그라미 쳐 가며 표시하는 것(집에서는 볼 수 없는 티비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이 그 때는 얼마나 좋던지!), 할머니가 해 준 맛있는 밥을 먹고 찾아놓은 간식을 돌려가며 먹으며 텔레비젼을 보다가 할머니가 성경책을 펴기 시작하면 텔레비전을 끄고 할머니와 예배를 드리는 것, 자기 전 요를 펴고 가위바위보로 누가 할머니 옆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결정하는 것,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디즈니만화동산을 보며 깔깔대다가 부랴부랴 교회 갈 준비를 하는 것… 그 많고 많은 주말들이 정말 행복했었다.

특히 우리를 위해 할아버지가 사 놓으셨던 31가지 맛 아이스크림과 내가 당시 엄청 좋아해서 밥숟가락으로 퍼 먹었던 땅콩잼과 포도잼이 한 줄씩 둘러진 미제잼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해운대로 이사를 간 후에도 주말이 되면 할머니집으로 놀러가곤 했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종종 식사를 했던 것도 같은데, 내가 고등학생이 된 후 아빠의 직장으로 인해 서울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교류가 그 전보다 훨씬 줄어들게 되었다.

서울과 부산으로 거리도 멀어지고 고등학생이 되며 본격적으로 공부에 집중하게 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만남도, 연락의 빈도도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다 명절이나 연휴에 한 번씩 부산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항상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할머니는 내가 먹고싶다는 김치국밥, 깻잎지, 팥죽 등을 해 주셨고, 늘 그렇듯 할머니집 창고에는 달달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부산에 온 엄마가 친구들을 만나러 밖으로 나가면 그것이 못내 서운하셨는지 나에게 슬며시 서운한 티를 내셨다. 친구가 많은 엄마와는 반대로 할머니는 굉장히 내성적인 분이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원인이었던 것도 같다. 그 모질었던 병이 발생한 이유.

친구도 별로 없고, 할아버지는 사업으로 바쁘셔서 할머니는 주로 혼자 계시는 시간이 많았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할머니는 혼자 성경책을 보시고 예배를 보셨다. 미국에 있는 아들 가족과 서울에 있는 딸 가족 걱정을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셨겠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할머니가 집에 있는 귀금속이 자꾸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그 즈음 엄마와 아빠가 다시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서, 할머니의 증상이 악화되는 양상을 종종 전해들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던 할머니의 병이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할머니의 증상은 시간을 두고 점점 심해졌다.

할아버지와 두 분이 같이 사시다가 할아버지가 혼자 할머니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엄마가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와 몇 달을 같이 살았던 것 같다. 전문가의 손길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을 때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고, 두 차례 정도를 거쳐 엄마와도 거리가 그리 멀지 않고 시설도 좋고 돌봐 주시는 분들도 좋은 요양원을 찾게 되었다.

그 요양원의 특별한 장점은 바로 옆에 실버타운이 붙어 있다는 점이었는데,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같이 살다가 혼자 살게 된 그 아파트에서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 바로 옆 실버타운으로 이사를 가셔서 매일 아침마다 요양원으로 할머니를 만나러 가셨다.

요양원의 간호사분들은 할아버지를 최고의 남편이라 불렀다지.


할머니는 종종 집으로 가야한다고, 고향인 거창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그게 기억이 난다.

최근의 일부터 기억이 흐릿해지고 어렸을 적 기억만이 남은 것 같았다.

요양원에 가시고 몇 년 동안은 우리 가족을 알아보시더니, 결국 나도 못 알아보시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딸인 엄마를 가장 오래 알아보신 것 같다.

나는 부산에 갈 때마다 할머니를 보러 가려고 노력했다. 알아보시진 못하지만 그래도 눈 맞추고 손이라도 한 번 잡아드리고, 어쩌다 할머니 웃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면 했다.  

피부는 정말 타고난 우리 할머니.

여전히 고운 얼굴을 하고 계셨지만 하루의 많은 시간을 누운 상태로 계셨다. 예전엔 낮잠도 안 자던 할머니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할머니와 마주앉아 이야기하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시간에 맞춰 성경책을 펴 놓고 예배를 드렸던 그 모든 순간들이 꿈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나 무섭고 슬프고 지독한 병이 있을까.


'스틸 앨리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존경받는 교수로 살고 있던 앨리스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게 되면서 그녀가 삶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그린 영화인데,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뀔 것이라는 두려움과 상실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담담하고 현실적인 묘사가 더 가슴을 울렸던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할머니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도 이렇게 안타깝고 마음이 슬픈데, 할머니는 얼마나 두려우셨을지.

지금까지의 행복했던 삶,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결국엔 할머니 자신도 잊어버리게 될 거라는 생각에 얼마나 불안하셨을지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할머니로 내 마음과 머릿속이 가득 차 있던 그 순간, 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생은 큰 소리로 흐느끼며 할머니의 마지막 소식을 전했다.

머리가 멍 해지며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다.

9월 25일.

내 아들이 세상에 나왔던 그 날, 나의 할머니가 천국으로 가셨다.


한참을 울다가 정신을 차렸는데, 꿀댕이는 내가 우는 것에 일도 관심이 없다는 듯 보고 있던 타요버스 만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공감능력 없는 아기같으니라고.

아직 눈치가 없는건지.

엄마와 통화를 했다. 장례는 미국에 계신 외삼촌이 한국으로 오는대로 치를 예정이라 이틀 뒤 부산으로 내려오면 된다고 했다.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파와 꿀댕이 생일이고 뭐고 다 뒤로한 채 침대 위로 엎어졌다.

꿀댕이와 함께 실컷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남편이 마침 도착해 있었다. 손에 페파피그케이크를 든 채.

머리가 빙글빙글한 채로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축하노래를 부르며 꿀댕이의 두 돌을 축하했다.

이런 삶과 죽음의 복잡미묘한 아이러니라니.




태어나고 죽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인생에서 관계를 맺는 많은 사람들, 많은 선택들, 그로 인한 영향력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순간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고, 열심히 살되 즐기는 삶을 살기를.

선한 영향력을 전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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