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는 어린이의 삶의 외적 현실을 바꿀 수는 없을 지라도, 이들이 세상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탐험하면서 즐길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는 있다. 또한 놀이는 잠시만이라도 모든 이가 평등하고 존귀한 참여자가 될 수 있는 좀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Play, while it cannot change the external realities of children’s lives, can be a vehicle for children to explore and enjoy their differences and similarities and to create, even for a brief time, a more just world where everyone is an equal and valued participant.
놀이생태계가 교란된 이후의 여러 부정적인 현상들을 놀이실조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보았다. 지금부터 놀이생태계를 복원한다면 문제들이 풀릴까? 자연 생태계가 훼손되고 교란된 이후에 다시 예전으로 되돌리려고 노력해도 완전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미묘하고 섬세한 균형이 있기 때문이다. 놀이생태계 역시 복원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비가역적이기 때문이다. 과거로 되돌아 가고 싶어도 시간을 꺼꾸로 돌릴 수는 없다. 영화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에 설경구가 철로 위에서 “나 돌아갈래”라고 절규한다. 그를 향해 육중한 열차가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주인공이 아무리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도 그건 그 사람의 마음뿐이고 열차처럼 질주하는 시간은 결코 후진하지 않는다. ‘전두환 때가 좋았다’거나 ‘박정희 시절이 좋았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제아무리 많아서 선거 인원의 과반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어른들이 어렸을 때 골목에서 마음껏 놀던 그 기억이 아름답게 남아서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하여도 그건 불가능하다.
마트료시카라는 러시아 인형은 작은 인형이 그 보다 약간 큰 인형 속에 쏙 들어가고, 또 다른 인형 속으로 계속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한 인간이 소속되어 살게 되는 사회적 환경을 그 규모에 따라 다섯 가지로 나뉜다. 가장 작은 환경을 미시체계라고 하고 그 다음 규모부터 중간체계, 외체계, 거시체계, 시체계라고 한다. 유리 브롬펜브레너라는 학자가 <인간발달의 생태학>이라는 저서에서 인간의 성장 환경을 이처럼 생태학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논하는 놀이생태계는 미시체계에 포함된다. 작은 규모의 체계는 그 보다 큰 체계의 변화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순응하여 변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가족이라는 미시체계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모한 다음에 1인가족이나 대안가족라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핵가족이 이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가족 형태임은 부정하기 힘들다.
다른 규모의 체계들이 변화하는 과정에 놀이생태계 역시 변모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변한 모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근거는 없다. 그렇다 해도 다른 4종의 체계가 변화했기에 놀이생태계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거나 혹은 옛 모습으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놀이생태계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개입하고자 할 때, 최적화라는 개념을 유념해야 한다. 놀이생태계의 최적화란 다른 사회 환경이 변화한 방향에 맞추되 가급적 놀이생태계를 안정화시켜서 아이들끼리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놀이생태계를 최적화할 때 이 문화적 환경이 자율적이면서 지속가능해야 한다. 성인이 의도하는 일방적인 방향으로 이끌면 자율적이지 않다. 자율적이지 않은 놀이생태계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성인의 개입과 지원이 없어지면서 사라지게 되는 놀이생태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놀이생태계를 최적화하기 위하여는 성인의 지원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인의 지원적 개입이 없다면 현재의 놀이생태계와 같이 파편화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
성인의 지원적 개입 없이는 놀이생태계의 최적화는 불가능하지만, 놀이생태계의 최적화를 위해서는 성인의 지원과 개입이 일방적이고 주도적이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명확한 지침은 불가능하다. 우선 성인의 지원적 개입이라는 것이 아이들의 성장 단계마다, 구성원들의 개성에 따라 그리고 각 성장 단계에서 하루하루의 상황마다 다른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원적 개입은 적확해야 한다. 어떤 시기에는 성인들이 주도적으로 놀이를 이끌어야 한다. 어떤 시기에는 잠깐만 놀이를 소개하기도 한다. 어떤 시기에는 그야말로 멍석만 깔아준 다음에 스스로들 뭔가를 만들어 나가다가 멘토링을 원할 때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야 한다. 성인 플레이리더가 가장 유념해야 할 개념 중 하나가 ‘놀이맥락’이다. 놀이맥락을 직관적으로 감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상황과 여건에 맞는 지원적 개입이 가능하다.
성인들이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놀이생태계를 최적화해서 다양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역동적인 문화 맥락 속에서 성장하도록 여건을 만드는 일이다. 여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한국 사회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말로 아동학대를 엄폐하는데 익숙한 사회지만 지금으로선 아이들을 위해 놀이생태계를 최적화하기 위한 다방면의 노력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