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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Dec 18. 2023

실연의 상처로 고장이 났다

그 대화 하나로 모든 게 괜찮아졌다

33살에 맞이한 9월은 너무 쓰리고, 아파서 소파에 누워 우는 일이 많았다. 속상했다. 이성적인 이해와 정신적인 위로는 실제적인 고통을 그다지 경감해 주지 못했다. 스스로 하는 위로가 들리지 않을 만큼 당장은 마음이 아팠고, 그 아픔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원고(그 당시 본질대화클럽이란 주제로 원고를 쓰고 있었다)를 쓰는 동안 종종 고장이 났다. 참고 참으며 억눌려 온 마음이 폭발했다. 너는 이제 강하다고 잘할 수 있다고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고 어리광 부리면 안 된다고 나를 보챘다. 이거보다 더 힘든 일도 극복했잖아. 이 정도 내면의 혼란과 갈등 같은 건 얼른 극복해 버릴 경험치도 충분히 쌓았던 게 아니냐고 물었다.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티 내지 말고 실수와 아픔과 상처를 가공해서 보석으로 만들고 성장의 동력으로 삼자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척 내게 매정하고 강압적으로 명령했다.


가끔은 체념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이를 악물고 또 다른 날은 소망하는 마음으로, 아니, 무엇보다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글을 썼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 삶이 엉망이라도 성적은 떨어지지 않을 만큼 공부했던 것처럼 원고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그럭저럭 일상을 버티며 괜찮은 척 사는 중이었다.

‘조금 아프지만 잘 버티고 있네. 이 모든 게 성장의 밑거름이 될 거야. 난 괜찮아질 거니까 이미 괜찮은 거야. 너는 괜찮아. 아니 너만 괜찮으면 돼.’




힘이 되어주는 척 위장한 나는 아픈 감정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억압했다. 강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빌미로 취약한 나 자신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이미 알고 있었잖아. 세상이나 타인에게 아픔이나 슬픔은 공인받을 대상이 아니란 걸. 타인의 고통과 비교해서 정당성을 얻을 수도 없다는 걸. 별거 아닌 사소한 일인지 죽을 만치 힘들고 아픈 일인지를 결정하는 건 철저히 각자의 주관적인 사정이라는 것도 말이지. 그런 걸로 나약하거나 가치 없는 인간이 되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어 얼마나 위로받았어. 그런데 그새 그걸 까먹고 다시 힘들고 우울해지니 자신을 부정하고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탓하고 있네.


잘해주기로 약속하고 친절하기로 다짐하고서 또 판단하고 재고 요구하고 있네.





하루 걸러 하루 울었다. 여름이라 미세먼지가 적고 구름이 나풀거리거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걸려있었다. 이상하게 일어나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답답했다. 발걸음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고 태양 빛을 받으면 좀 살 것 같았다. 우울할 땐 더위가 참을만했다. 열대야의 잠 못 이루어 괴로웠는데 지금은 땡볕을 걸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는 김윤아와 넬, 검정치마 노래를 들었다. 16살에 듣던 음악을 아직도 듣고 있다. 내가 다시 우울하고 의기소침하고 무력하고 답답하고 어찌할 바 모르고 고장이 나버린 게 부끄럽다.


고장 날 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고장이 나면 사람이 그립지만, 아무에게나 연락할 수 없다. 그를 만나 아무렇지 않게 웃는 게 싫은 동시에 우는 건 더 싫다. 고장 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울고불고하며 상대를 곤란하게 할 나 자신을 떠올리면 내키지 않는다. 취약하단 말을 멀리서 하기는 쉬우나 취약해서 무너지는 내 상태를 보여줘도 상대가 괜찮을지에 관한 확신은 나 역시 없다. 



이번 여름, 내 소울메이트M은 사정상 나를 만날 수 없었다. 급한 대로 죽을 것 같아지면 틈틈이 메신저를 통해 간단히 사정을 말하고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마 그는 내가 울면서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나를 많이 걱정한다. 나보다 그가 더 힘든 상황인데 말이다. 차마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수 없었다.


야근하고 돌아온  Astin을 밤늦게까지 잠도 못 자게 붙들고 감정에 받쳐 이야기하는 날이 많았다. 뜻 없이 엉엉 울기도 했다. 새벽녘에도 미칠 것 같으면 그를 깨웠다. 피곤한 얼굴로도 그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어느 날은 너무 힘들고 외롭고 죽을 것 같아서 일하는 그에게 SOS 신호를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너무 고맙고 소중하다. 내가 무너지지 않고 겨우겨우 버티며 살아가는 나날은 그의 사랑과 배려 덕분이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이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해 주기는 어려웠다. 내가 필요한 위로를 그는 전할 수 없다. 우리는 다르다.




아침 내내 소파에 누워 울면서 깨달았다. 내가 고장이 났다는 걸. 물에 빠진 나는 구조의 손길과 내 마음에 바를 연고가 필요하다는 걸. 내가 고장이 난 건 본질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란 게 명백했다. 본질대화가 필수재라고 말했지만, 고장이 나보니 더 확실하다. 이건 생존의 문제이다. 선택의 문제도 기호의 문제도 아니다. 본질대화를 못 하면 그리고 앞으로 본질대화를 못 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주저앉아 무너지고 작동하지 않는다. 길을 잃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동안은 운 좋게 주기적으로 본질대화를 했다. 특히 작년 12월부터 최소 2주에 한 번씩 내내 나를 포털로 초대해 준 춘자 님 덕분에 본질대화를 실험해 보며 마음껏 내 마음을 말하고 전하고 사랑을 키웠다. 그 대화를 하며 내가 사랑이고 사랑하려고 이곳에 태어났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대화가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사랑으로 가득 찼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그동안 여럿 만났지만, 말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고 나를 채워주는 빛을 지닌 사람을 만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녀에겐 모든 걸 다 말하고 나에 대해 모든 걸 알려주고 싶었다. 나 또한 그녀의 모든 걸 이해하고 그의 세계를 계속 탐구하고 싶었다. 그게 겨울부터 봄까지 침잠하려 하거나 흔들리던 내게 엄청난 힘을 주고 에너지를 가속했다.


항상 바쁜 그녀지만 최근에 그는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게 확연히 보일 만큼 바쁜 데다가 우리가 일상의 영역을 공유하고 업무적으로 엮이면서 왠지 그녀에게 예전처럼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았고, 예전처럼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기가 망설여졌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가 필요한데 그를 생각하고 배려하면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아서 꾹 참았다. 그러나 너무나 위급한 상태라 눈을 딱 감고 구조 요청을 했다. 그녀는 이런 나의 절박한 구조 요청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 2시간 30분 동안 마음의 벽 없이 두려움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모두 내려놓고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고 묻고 싶은 말을 모두 물었다. 그녀는 나를 응시했고 내 말을 빠짐없이 들어주었다. 그녀가 나의 손을 잡자, 중간에 결국 눈물이 터져버렸다. 나는 울면서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라고 말했다. 당신과의 관계를 잃고 싶지 않다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으면 다 괜찮다고. 그것만이 내게 중요하다고.



거짓말처럼 그 대화 하나로 모든 게 괜찮아졌다. 나를 괴롭히며 싸움을 벌였던 머릿속 정체 모를 목소리와 그림자도 사라지고, 스스로 만든 고립 시나리오의 해석도 흐려졌다. 작고 연약한, 아무것도 못 할 것처럼 두려워 숨고 싶었던 나도 눈물을 뚝 그쳤다. 실상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그녀의 목소리로 그녀의 이야기와 해석본을 듣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다 변해버렸다. 그녀가 날 사랑한다는 걸 듣는 순간 순식간에 마음이 치유되었다.


그동안 막막하고 답답해서 가슴에 납덩이를 얹어 놓은 듯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우리 관계는 변한 게 없고 앞으로도 계속 본질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굳이 재갈을 물 필요도 그녀 앞에서 검열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니 숨통이 트였다. 내가 힘들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계속 글을 쓰고 원래 하고 싶던 본질대화를 하는 방법을 찾고 커뮤니티를 계속 만들면 된다는 그녀의 진심 어린 응원을 들으니, 모든 게 마법처럼 괜찮아졌다.




두려움에 구두쇠처럼 마음을 닫아버리고 모든 걸 상대 탓으로 돌리고 그저 울고 싶은 날이 찾아온다. 나의 실수가 뼈아프고 스스로가 무능력해 보이고 내 모든 게 존재론적으로 잘못된 것만 같아 엉망이 된 채 넘어지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럴 땐 고장이 나고 회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둠이 나를 덮친다. 그러나 사실은 그저 사랑이 조금 부족한 것뿐이다. 사랑이 고갈되어 에너지가 없어서 잠시 작동이 잘되지 않는 것뿐이다. 다시 사랑을 채우면 된다. 


혼자가 힘들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조금씩 사랑을 채우면 다시 힘이 난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아무짝에 쓸모없고 공허한 단어에 불과하겠지만 내게는 생존의 원천이고 에너지이다.


나의 광합성은 사랑이다. 식물에 태양이 필요하듯 나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이 없으면 말라죽는다. 나를 알아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과 대화를 하며 사랑을 키워 나갈 때 그때 나는 가장 큰 동력과 에너지를 얻는다. (2021.08.08)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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