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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Dec 20. 2023

삼화사의 편지가 도착했다

삼화사에는 편지를 쓰면 6개월 후에 배달을 해주는 느린 우체통이 있었다

조그만 크기로 훨씬 더 큰 적들을 상대하는 전갈은 몸을 지탱해주는 뼈가 없다. 그 대신 자신을 보호해 줄 단단한 껍질을 갑옷처럼 두르고 산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갑옷이 몸과 함께 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껍질보다 몸이 커지면 전갈은 껍질을 버리는 탈피를 시작한다. 당연히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위험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탈피하지 않으면 남아 있는 껍질이 몸에 박혀 죽을 수도 있다. 탈피한 뒤에 곧바로 새로운 껍질이 돋아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전갈은 탈피할 때가 되면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바위틈이나 수풀 속에 자신을 숨기며 시간을 보낸다. 더 큰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연적인 고독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전갈은 이 힘든 과정을 완벽한 성체가 되기 전까지 적게는 네 번에서 많게는 아홉 번 반복해야 한다.
          
 -은둔의 즐거움, 신기율, 49~50p





9월 마지막 날엔 눈물을 그치고 삼화사로 템플스테이를 하러 갔다. 자연의 고요 속으로 숨어들고 싶었다. 눈물은 멈췄지만, 여전히 심장이 찌릿했다. 여전히 내 안에 소리가 들렸고, 그걸 용해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삼화사에 가기 위해서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 오롯이 나를 위해 시간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조금 더 깊숙한 곳까지 도달해서 친절한 태도로 스스로와 대화해 보기로 했다. 외부에서 받는 자극을 최소로 줄였다. 인스타그램을 쉬고 만남도 되도록 갖지 않았다. 바깥의 시선을 완전히 내부로 돌렸다. 


감정을 다시 이해하고 포용해 보고자 고요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더 해빙’, ‘은둔의 즐거움’, ‘내 안의 평온을 아껴주세요’ 등. 책을 읽으며 유독 와닿고 머리가 맑아지는 구절을 찾게 되면 정성 들여 손 글씨로 필사했다. 세상이 내게 주는 위로의 메시지를 받아 적었다.


감정을 온전히 살피기 위해서는 차분한 태도와 평온한 마음 상태가 필요했다. 명상을 틈틈이 필요할 때마다 했다. 14살 때처럼 비밀일기장에 가감 없이 감정을 적었다. 오늘 느낀 사랑과 평온을 적으며 스스로를 격려하기도 하고 기분 좋게 만드는 확언을 적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두려움과 분노를 적는 것이었다. 두려움과 분노의 실체를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했다. 삶이 내게 당면하라 요구한 과제는 나의 두려움의 실체를 정면에서 마주 보는 일이었다. 아무리 평온하고 사랑이 가득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가도 조금만 상황이 바뀌면 곧바로 분노를 표출하는 낯익은 버튼 하나가 심연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부모님의 다툼이 내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던 것 같다. 불안함, 배제당할까 두려워했던 마음의 곪은 상처, 버림받을까 무서워 차라리 먼저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억압과 통제이다. 나는 역할 설정을 한 후, 사회적 기준을 맞추기 위해 눈치를 보고 내 본래 모습을 숨기는 방식으로 소속되려 애써왔다. 욕망을 말하지 않았고 감정을 억눌렀고 버림받을까 다가가지 않았다. 다시 가면을 쓰고 역할 놀이를 하게 될까 두렵다.


그래서 내 모습, 기질, 성향에 관해 누군가 지적하거나 조언하면 분노와 두려움이 강하게 역동한다. 바꿀 수 없는 나의 모습을 문제 삼아 나를 떠나거나 내칠까 두렵고 한 편으로는 또다시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다시 예전처럼 나를 억누르고 살게 될까 두렵다. (2021.09.09)



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고 부정하지 않고 직시하기 위한 일기를 솔직하게 썼다. 아무리 기쁜 일이 가득하고 사랑이 넘쳐흐른다고 해도 근원적으로 날 슬프게 만드는 이 핵심 신념을 치유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버튼이 눌릴 수 있다. 원치 않아도 누군가 상처 입히고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해야 할 다음 일을 받아들이자 차츰 마음으로 평화와 사랑이 돌아왔다.


아직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지만,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삶을 따라가면 알게 될 거야. 





삼화사를 다녀온 이후 꿈을 통한 내면작업을 했다. 내가 꾸는 꿈이 개꿈이 아니라 무의식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꿈은 내가 필요로 하거나 지금 내가 오인하고 있거나 놓치고 있는 의미들을 상징의 언어로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 언어는 모호해서 해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직관을 발달시키고 싶었다. 내게 옳은 결정을 내리고 맞는 선택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관이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 직관과 관련한 서적을 찾아봤으나 원하던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상상에 관한 책에 연결되었다. 책을 읽으며 상상과 직관이 같은 속성을 지녔다는 걸 발견했다. 다만 상상이 직관보다 좀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기술이었다. 거기엔 저항과 두려움, 불안의 자리는 없었고, 차분하고 조용하나 의연하고 강직한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지혜이고, 앎이었다. 


상상의 힘을 알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자아관념과 느낌을 통한 창조의 힘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네빌 고다드의 책을 모조리 읽었다. 조 디스펜서의 책을 읽고 그 이외 헤르메스주의와 신비주의자, 초월에 관해 말하는 책도 읽었다. 모든 편견을 내려 두고 왠지 끌리거나 흥미가 생기는 책을 구분 없이 도서관에서 빌려 몰입해서 읽어 내려갔다. 



몸을 돌봐주었다. 고민만 하던 필라테스를 시작했고 필라테스를 통해 호흡을 배우고 바른 자세와 정렬을 배웠다. 매일매일 산책을 했다. 내게 필라테스가 잘 맞는 운동이고, 산책을 못 가는 날엔 서운할 정도로 산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해가 바뀌고 사랑의 마음만을 엮어 책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자연스럽게 했다. 그 상상을 떠올리고 글을 쓰면서도 매일 행복했다. 온라인 독서 모임을 한 달에 한 번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을 갔다. 맛있는 음식과 커피를 마시며 종종 본질대화를 했다. 


그렇게 가을과 겨울, 고장 나고 상처받은 마음과 존재는 천천히 고요하게 재생되었다.




삼화사에는 편지를 쓰면 6개월 후에 배달을 해주는 느린 우체통이 있었다. 거기 편지를 넣으려다 대신 일기장에 6개월 후 내게 전할 편지를 적어 두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 이듬해 4월 갑자기 문득 그 편지가 떠올렸다.



Dear 스텔라

삼화사에 느린 우체통을 발견했어. 편지를 넣으면 6개월 후에 도착한대. 그걸 쓸지 고민하다가 여기 대신 적기로 해. 6개월 후의 너에게. 
 지금 너는 삼화사야. 계곡에서 네가 원했던 혼자만의 시간을 마음껏 보냈어. 자연은 어쩜 이렇게 평온과 사랑의 에너지가 넘치는 걸까? 문득 신기했지. 어느 날 네가 계곡에 가고 싶어 했잖아. 너의 기대보다 더 웅장한 폭포와 장엄한 바위가 있는 장소로 너를 데려다준 선택을 기억하고 말이지. 혼자 방을 쓰고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생각보다 삼화사는 더 아늑해. 밥도 맛있고. 대부분의 시간 어디 가지 않고 함께 여기 있었어. 감사를 느끼며.

너는 지금 어디야?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기분이 들어도 판단 없이 일체의 온전한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겠다는 그 결심은 여전히 너의 것이야? 아니면 또 어떤 일에 길을 잃거나 절망하고 있어?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더라도 두려워하지 마. 용기, 넌 이것을 지니고 있지. 이건 언제나 너의 것이야. 네가 잊어도 나는 ‘용기’를 찾아 널 일으켜 세우고 다시 하자 손 내밀 거야. 

기억해.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 아주 많이.

4월, 꽃이 필 계절이네. 사실 궁금한 게 많아. 그렇지만 묻지 않을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만히 네 얘기를 들을게. 꼭 반드시 그래야 할 일이나 정답 같은 건 없어. 다만 오래오래 평온하고 깨어 있고 사랑을 간직하고 있을 거란 걸 알아.

고마워.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해줘서, 함께 모든 걸 경험하고 나아가서. 이번 삶에 많은 걸 배우게 해주고 많은 걸 느끼게 해주고, 더 멋진 영혼이 되게 해줘서. 

우린 더 많은 걸 알아가고 온전한 경험이 늘어가고 지혜롭고 평온해지지. 잠시 길을 잃어도 곧 다시 나를 만날 거야. 때론 기다림이 필요하지. 

온 마음 다해서 진심으로 사랑한다. 늘 용기와 지혜를 품고 있단 걸 기억해. 그럼, 이 편지가 오늘 너에게 기쁨이 되어 주기를 바라며.

2021.10.1, 삼회사에서 ‘너’로부터



편지를 읽다가 울어버렸다. 내가 내게 쓴 편지를 읽고 울어 버리다니. 그 애는 아무것도 몰랐는데도 마치 지금의 상황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편지를 썼다. 그 애는 최대한 다정한 말로 조심스럽게 자기 안에 남겨진 모든 사랑을 꾹꾹 눌러 담아 진심 가득한 편지를 썼다. 그 사랑이 너무 깊고 아득해서 편지를 읽다가 왈칵 눈물이 터져 한참을 누워 감사한 마음을 느꼈다. 


확신 없이 적어 둔 그 애의 ‘그랬으면 좋겠다’가 현재 내 모습이 되었다. 나는 그때와 너무 변한 동시에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사랑, 사랑, 사랑, 그리고 또 무한한 사랑만이 존재했다.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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