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가 내게 “안온함에서 빠져나와 자네의 왕국을 찾아 떠나라”고 했을 때 나는 배신감과 혼란스러움을 느꼈고 버림받은 것만 같았다. 나는 내 의심을 풀어줄 해결책이나 대답을, 나를 격려해주고 다시 내 영혼을 평화롭게 해줄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의 왕국을 찾아나선 이들이라면 안다. 그런 것들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들이 만나게 되는 것은 고난과 오랜 기다림의 시간, 예기치 못한 변화뿐이다. 그나마 운이 나쁘면 아무것도 만나지 못한다.
이건 과장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찾고 있다면, 그 무언가 역시 우리를 찾고 있다.
-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77p
지난해 여름 포털이 닫히기 직전 그곳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는 나를 벙찌게 만들었다. 그 대화 속엔 내가 궁금했던 답이나 듣고 싶던 말은 하나도 없었고, 상상도 못 한 말만 오고 갔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물었다. 나는 그저 나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아직 스텔라가 아니며 자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은 지금의 내가 아닌 ‘스텔라’라고 말했다. 만약 그들을 위한 열쇠를 찾고 싶다면 그 ‘스텔라’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스텔라를 찾는 방법은 이미 내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순간 머릿속에 알레가 스쳤다. ‘알레를 만나야 하나요?’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건 마음 깊은 곳에 은밀히 묻어두었던 일이었지만 한동안 잊고 살았던 일이었다.
그러죠 뭐. 덜컥하겠다고 말했다. 확인을 받거나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마음이 변하거나 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그만두어도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으로서 온전히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페이스북을 로그인하고 바로 알게 되었다. 이건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란 걸. 너무 늦었다. 알레는 이미 내 우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와 그가 동시에 아는 유일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신기하게도 그는 이번 여름이 시작될 무렵 자취를 감추었다고 답했다. 그게 알게 된 전부였다.
8월의 마지막 날 내 소울메이트 M을 만났다. 여름이 된 이후 처음이었다. 두려움에 주저하다가 알레의 소식과 내가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잘 생각해 봐. 그건 결국 네 마음 편해지고자 하는 위안일 뿐이잖아.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야 해. 재회 여부는 너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고 봐.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넌 그걸 강요할 권리가 없는 거지.
맞는 말이었다. 기다리자. 다시 우리가 만나야 할 운명이라면 알레의 우주에 다시 내 자리가 생긴다면 그는 응답할 것이다. 만약 그가 원치 않아 다시 만나지 못할 인연이라면 내 욕심이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이번엔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게 맞았다. 기다리는 일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사실은 크리스마스나 그의 생일쯤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고 희미한 희망을 품었다. 간간이 페이스북에 들어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텅 비어 있었다. 가끔 그의 안녕과 행복을 빌었고 아주 가끔씩 그가 꿈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내 우주에서 알레를 완전히 보내주기로 했다.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나의 역할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백마 탄 왕자였다. 자기주장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공주를 악당의 소굴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에 내 할 일은 끝이 났다. 그러니 퇴장이다. 공주의 일상은 공주의 것이었다. 그렇게 정리하자 알레와 함께하지 못해 과거에 생겨났던 죄책감이나 후회가 말끔히 정리되고 마음이 맑아졌다.
알레에게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보낸 지 10개월이 흐른 뒤였다.
그날 아침엔 커튼을 치고 어둠 속에서 명상하고 있었다. 아침 8:30분, 핸드폰에서 하얀 빛줄기가 새어 나왔다.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별거 아니라고 아마 광고나 알림 일 거라고 애써 무시하곤 다시 명상에 집중했다. 10분이 더 흐르고 명상을 끝냈다. 오랜만에 한 친구가 보낸 카톡이었다. 그의 카톡은 생소하다 못해 불길했다.
세상에! 그가 보내준 메시지 안에는 나를 찾는 알레가 있었다. 그는 어제부터 내게 연락을 시도했다.
-알레!!! 네가 나를 찾다니 믿을 수 없어! 나 진짜 행복해.
-나도 행복해.
-어디야?
-캘리포니아, 넌?
-한국, 내가 연락했을 때 넌 사라져 버렸거든 그래서 생각했지. 다신 날 만나고 싶지 않구나.
-알아. 미안해.
-그럴 필요 없어.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무척 반갑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그날은 다른 일이 있었다. 연락처와 이메일을 주고받고 다음 날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반가움과 기쁨으로 세포들이 터져 나갈 듯이 춤췄다. 정말 다시는 이번 생애 그를 만나지 못할 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주가 돌아왔다. 공주는 무슨 마음일까? 기쁨과 흥분이 진정되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지금의 공주를 알아가야지. 내가 원하거나 통제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그의 지금이 어떤지 알고 싶다. 그가 괜찮다면 이번엔 진짜로 그를 만나서 책을 전해주고 고마움을 전해야지.
공주와 만나기 전에 동반자인 Astin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늘 진실을 말하고 싶다. 긴 대화를 통해 Astin은 썩 유쾌하진 않으나 이미 연락이 온 순간 일은 벌어졌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진짜 괜찮은 게 맞는지, 괜찮은 척하는 거 아닌지 재차 물었다. 내가 유별나고 희한한 사람이라서 미안하다고도 덧붙였다.
그는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인데, 꼭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모험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서 이런 나의 성향을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걱정된다고도 말했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만, 살아보니 확연히 드러났다. 우리가 가장 다른 점은 이것이었다. 위험 요소와 상황을 제거해서 안정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그와 새로움과 변화를 기꺼이 찾아 나서는 모험가인 나. 우리는 상극이다.
그가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이것이 좋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장기적으로 우리 관계에 좋은 결과로 작용할 거란 걸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겐 미친 소리로 들릴 것이고 그도 논리적으로 설득할 순 없고, 때로는 내가 그를 가스라이팅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다만, 내가 걱정하는 건 이런 나로 인해 그가 스트레스 혹은 상처를 받거나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이다. 만약 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알레를 만나지 않겠다고도 덧붙였다.
Astin은 놀라며 진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있는 게 맞냐고 장난스레 되물었다. 작년 여름, 20세기소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것은 예정된 사건이었단 걸 그는 어쩌면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