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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남은 하루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Nov 10. 2023

올여름엔 가족과의 남도여행과 친구들과의 양평여행 그리고 인근 카페에서 반나절을 넉넉히 보내고도 또 하루가 남았다. 남은 하루. 내가 오늘을 두고 '하루의 여유' 혹은 '또 하나의 하루'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냥 '남은 하루'라고 했다. 내 인생으로 기록되는 정규 인생이 아닌 어쩌다 얻게 된 보너스 시간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뭐가 다를까? 그저 내가 무엇을 해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관여하지 않는 완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젯밤 잠들 무렵에는 '내일은 나의 여유분이니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 된다'라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무엇을 하며 놀 것인가에 대해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자유로운 마음으로 무엇을 해볼까?'가 아니라 '지금 당장 뭘 하며 놀고 싶냐?'로 질문을 바꿨다. 그러니 골프와 노천탕이 동시에 후보로 떠올랐다. 머뭇거리지 않으려고 야외 골프연습장을 찾아 바로 출발을 했다. 오랜만에 그물망이 없는 확 트인 연습장에서 클럽별 공의 구질과 정확한 거리를 측정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찾은 곳은 용인시에 있는 'OO골프연습장'이었다. 30분 거리에 주차장도 넓고 연습장의 환경도 매우 깔끔했다. 다만 오늘 하루도 무더위가 예상되어서인지 타석은 많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너무 일찍 도착해서인지도 모른다. 규정보다 3개나 많은 클럽이 들어있는 무거운 캐디백을 들고 가장 중앙에 위치한 18번 타석으로 향했다. 팔목 부상으로 인해 약 50일 동안 잡지 못했던 클럽을 드디어 제대로 잡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 손목 통증이 남아 있으나, 스윙할 때 느끼는 손맛에 대한 기대감을 꺾지는 못했다.



연습장은 실로 몇 년 만에 방문이다. 그래도 예전의 연습 루틴을 기억해 내며 100분 동안의 연습을 시작했다. 샌드웨지에서 출발하여 갭 웨지, 피칭웨지 순서로 5개씩 스윙을 해보았다. '아! 이거야! 바로 이 손맛이야!' 하며 혼자 중얼거리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리고 9번 아이언에서 3번 아이언까지 다시 4번씩 스윙을 했다. 그런데 잘 나가다가 3번 아이언에서 정타가 되질 않았다. 나의 주 무기인 3번 아이언이 맞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날 잘 맞지 않는 클럽은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유틸리티와 드라이버를 10번 이상씩 스윙했다. 묵었던 스트레스가 타구와 함께 날아가 버릴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아마 필드였더라면 3번 아이언은 이미 포기하고 캐디백에서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안 맞는 클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연습장이다. 그렇게 한 세트를 완성하고는 3번 아이언을 제외하고 다시 한번 한 세트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3번 아이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판기에서 이온음료를 사러 갈 때도 이마와 등줄기로 흐르는 땀을 닦기 위해 화장실에 들를 때에도 그리고 로비에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할 때도 3번 아이언을 쥐고 다녔다. 샤프트 길이와 로프트 각도 그리고 헤드의 모양 등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어진 100분의 시간이 종료되기 5분 전에 3번 아이언만을 들고 타석에 들어섰다. '연속해서 3번만 성공시키고 가자'였다. 정말로 3번 연속해서 200m 선상에 떨어졌다. 이 혼자만의 짜릿함이란...



필드가 아니라서 다소 아쉽지만 오늘은 이 손맛으로 만족해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보너스로 얻는 하루니까 말이다. 노천온천의 황홀감은 가을여행에서 만끽하자며 캐디백을 정리했다. 그리고 사우나의 찬물 샤워를 기대하며 사우나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사우나는 연습장 규모에 비해 너무 협소했다. 샤워부스가 고작 5개밖에 없었고, 온탕과 냉탕 그리고 그 흔한 사우나실도 없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조조할인해서 16,000원을 주고, 100분의 연습과 사우나라니 얼마나 혜택 받은 날인가? 라며 샤워를 마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 순간 왼쪽 바로 앞쪽에 큰 유리문을 발견했다. 대형 여닫이문을 여니, 작은 노천탕과 사우나 시설이 오페라의 무대처럼 갑자기 꾸며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더위를 먹고 몽롱해져서 꿈을 꾸는 것일까? 마치 예전 고향마을의 우물과 같은 크기에 정겨움이 담긴 노천탕이었다. 부지런히 물갈이를 하고 있는 어떤 할아버지와 단둘이서 노천탕에 몸을 푹 담그고 앉았다. 주변엔 대나무들이 고요한 정취를 더해줬고 인근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해금 소리가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한참 동안을 그 노천탕 안팎에서 즐기다가 마음이 꽉 찬 상태에서 중단하고 나왔다. 용인에만 와도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다니 놀라웠다. 정말 '직장이 아니라면 수도권에서 더 멀리 떨어져 살수록 삶은 윤택해진다'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오늘은 나에게 보너스였다. 그냥 덤으로 주어진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보너스를 정규 인생으로 되돌려 놓고 싶다. 풀세트의 클럽으로 만끽한 손맛과 예상치 못한 정겨운 노천탕의 행복을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은 하루는 자연스럽게 이어진 정규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행복으로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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