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맛
2002년, '감 따는 아이들'이라는 웹 사이트를 통해 헝겊 인형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헝겊인형을 만들어 코엑스 몰과 인사동에서 인형전시회를 했고, 여러 작가들과 함께 독일 인형 전시관의 초청전에도 참여했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신선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인형작가로 전격 활동해 볼까 망설였던 시기였다. 웹을 통해 알게 된 어떤 분은 나의 사이트를 위해 무료로 '감 따는 아이들'의 로고도 만들어 주셨고, 서울에서 규방공예 지도강사를 하시던 분으로부터는 자수 선물도 받았다. 제주도에서 한라봉을 한 박스 선물로 보내주신 분도 계셨다. 지난 세월 만났던 따뜻한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웹 커뮤니티를 통해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었다. 전주라는 나의 고향뿐 아니라 전국에 있는 헝겊인형 작가들과 교류했고, 해외에 있는 인형 작가와도 좋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인형 만들기와 모든 활동을 접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경험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의 여러 작품 중 사진 두 장을 첨부한다. 나의 헝겊인형이다. 나만의 기법으로는 바늘땀으로 입체적 표현을 한 후, 바디 전체를 황토물에 담가서 황토 염색을 했다. 그래서 보는 이들은 닥종이 인형이 아니냐고 물었다. 2002년부터 이와 같은 기법으로 바디에 염색 작업한 나의 인형들은 전혀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다. 닥종이 인형도 제작해 보았는데 보관 시 습도 문제가 있었다. 잘못하면 곰팡이가 핀다.
인형 작업을 시작할 즈음, 감나무가 20그루는 족히 되는 시골 땅을 구입했다. 작은 농막이 있는 그곳에서, 남편이 일하면 나는 베짱이처럼 오카리나를 불거나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그중 내가 열심히 한 것이 있다. 봄이면 쑥을 캐고, 감잎의 새싹이 나오면 감잎차를 만들고, 감이 익기 전 땡감으로 천에 감염색을 하거나, 가을에 감을 따서 곶감을 만들고, 겨울이면 그 곶감으로 수정과를 담는 작업이었다. 그곳은 너른 풀밭이 있어서 천연염색을 해서 말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무공해 청정 산골인 농막의 주변은 쑥밭이다. 지금도 해마다 봄이면 쑥이 예쁘게 자라고, 가을에 풀을 베어내면 가을 쑥이 얼굴을 내민다. 언젠가 직장 동료들과 가을 쑥을 캐고, 장대로 감 따기도 했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따는 시기는 잎이 물들어 떨어지기 전에 딴다. 그중에 이른 홍시를 따게 되어 맛을 보기도 하지만 첫서리가 내린 후 감나무에 달린 홍시의 맛은 자연이 입안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 맛있는 홍시가 되었을 때 까치가 내려앉아 감을 파 먹는다.
어른들이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 장대로 감 따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아이가 된 듯 여겨졌다. 그 순간 그들도 아이의 마음이 되는 것 같았다.
감잎차는 감잎을 따서 씻고 잘 말린 후, 찜솥에 1분 40초를 쪄 내었다. 첫 잎을 따서 만들었던 첫 잎 감잎차는 색조가 싱그럽고 향과 맛이 뛰어났다. 20년간 단 한번, 정말 맛있는 첫 잎 감잎차를 만들어 보았다. 일주일만 시기를 놓쳐도 '맛있는 차 만들기'는 실패인 것 같다.
천연염색으로 여러 가지 작업을 했다. 특히, 땡감으로 하는 감염색은 장마를 이겨 내는 것이 힘들다. 제주도에서 많이 하는 이유가 바람과 햇볕이 좋기 때문이다. 갈옷이라고 하는 감염색으로 된 옷은 항균효과가 뛰어나다. 농막 풀밭에 감염색을 해서 빨랫줄에 올려놓으면, 바람과 햇볕을 고이 받아 예쁘게 펄럭였다.
농막의 감은 '먹감'이다. 검은 반점이 군데군데 있는 감으로 자그마하고 아주 달다. 감장아찌나 곶감용으로 제격이다. 외국인 친구에게 감나무 사진을 보내니, "오렌지가 참 많이 열렸구나." 하고 말했다. 무르익기 전에 주황으로 물든 감을 따서 깎아 끈으로 줄줄이 엮어 말렸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플라스틱으로 된 감 꽂이를 사용하는 집들이 많았다. 그것을 한번 사용해 보고 싶었는데, 환경을 생각한다는 취지와 대량 생산이 아니라는 점으로 인해 마끈 같은 것을 이용했다. 예전에 할머니께서는 감을 깎고 난 껍질을 말렸다가 시루떡에 넣으셨다.
감을 말리기 위해 낱개를 연결하려면, 딸 때부터 정성이 필요하다. 장대 끝에 가위 모양이 달려있고 손잡이 부분을 작동하면 싹둑하면서 가지가 꺾이는, 가위의 역할을 하는 장대를 샀다. 그 장대로 감나무 잔가지를 톡 꺾어 낱개로 다시 끈을 묶을 부분을 만들었다. 상처 난 감은 공기 중에 두면 부패한다. 남편은 상처 난 감들을 잘 씻어 물기가 빠지게 말린 후, 장독에 그물망을 씌워 감식초를 만들었다.
줄줄이 엮어 말리는 감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솔솔 했다. 점점 마르면서 떫은맛이 사라지고 단맛만 남게 된다. '오늘은 다 되었나, 내일은 되겠지.' 하면서 매일 주물럭거려 보다가 드디어 어느 날 단맛만 남게 되어 다디 단, 곶감을 맛보게 된다.
떫은맛이 사라진 후 조금 더 말리면 흰 가루가 나온다. 그 부분에서 완전히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릴 때 먹었던 곶감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곶감을 냉동에 두고 하나씩 간식으로 먹거나, 그다음 해 곶감을 다시 만들 때까지 여러 요리에 이용한다. 나는 곶감을 썰어서 빵이나 타파스 등의 양식 요리에도 이용했다.
곶감 수정과의 베이스 음료를 만들려면 통계피 몇 조각, 생강 반쪽을 넣어 끓이다가 흑설탕을 넣어 달여준다. 다 된 수정과 물이 식으면 냉장고에 두었다가 먹기 하루 전날 곶감을 넣어준다. 수정과에 잣을 동동 띄워 내면 향기도 좋고 색도 아름다운 음료가 된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요리가 자꾸만 생각난다. 푸른 감이 주황색이 되자마자 만든 '우린 감', 주렁주렁 말린 곶감, 감 장아찌, 말린 감의 껍질을 넣은 가마솥 시루떡, 겨울날 언 수정과, 짚으로 층을 내어 겨우내 창고에 두고 먹었던 홍시 등이 생각난다. 아궁이의 군불을 이용한 가마솥의 요리와 자연이 말리고, 얼린 음식들은 그 어떤 제품을 이용해도 '자연의 맛'을 완벽히 재생시키기는 어려운 듯하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그녀의 외관, 말과 행동거지, 글 등, 한 사람이 세상에 내놓는 에너지에서 자연 내음이 없다면 오래 여운이 남지 않게 될 것이다.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주황색 불빛 같은 동글동글한 감, 자생으로 매달려 있는 열매를 두고 생각해 본다. 옛날 어른들은 손이 닿는 곳이라 할지라도 감을 모두 따지 않고, 새들을 위한 먹이로 남겨 두셨다. 우리는 감을 딸 여유가 없어서 따지 못한다. 달라진 시대를 사는 나는 더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는가 자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