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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종결자 Sep 26. 2018

질문은 '어디'가 아니라 '무엇'에 있다

 

"여러분이 꼭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일을 하세요." 

"즐기는 사람을 따라올 자는 없습니다!." 


이제와 말이지만 나는 오래도록 정말 이런 말들이 싫었다. 누군들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고 싶지 않겠나? 그저 앞서 성공한 사람들이 해대는 껍데기 같은 말인 것 같아 듣기가 거북했다. 


학창 시절에 어른들은 끊임없이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라고 물었지만 정작 '무엇이 되면 좋을까'를 잘 고민할 수 있는 방법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 같다. 천편일률적인 교육 아래 뭐가 됐든 우선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중요하고, 그 이후엔 또 무슨 일을 하든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기업에 가는 것이 우선인 사회를 만들어 놓고선 그곳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다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이제 와서 '사랑하는 일을 즐기면서 하라'니! 심술이 날 법하지 않은가? 


어려서는 방송인, 그중 인터뷰어를 꿈꿨다.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상상만 해도 설렜다. 그래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지만 이내 내가 방송인이 되기엔 외모, 화술, 순발력 그 무엇 하나 그리 경쟁력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끈기와 성실의 대명사였던 김생민 리포터나 다재다능한 김슬기 리포터가 되지 않는 이상 인터뷰로 밥 먹고 살기도 글렀다 싶어 마음을 빨리 접어 버렸다. 


남아있는 선택은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하는 것이었다. 졸업 후 한국에서 취업할 경우 내게 주어진 시나리오는 두 가지였다. 직장과 한 몸이 되어 열 근하며 살다 서른 즈음 결혼과 임신을 하고 워킹맘으로 살거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에 올인하며 사는 1번 시나리오. 싱글 커리어우먼으로 장기근속하다 살이 찌는 순간 볼품없는 노처녀로 강제 전락하는 2번 시나리오. 1번 시나리오를 선택하자니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는 것이 문제요, 2번을 선택하자니 송은이 김숙처럼 내 곁을 지켜줄 평생 단짝과 전문 역량이 없다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무작정 한국을 떠나야 이 제한된 시나리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의 내가 보면 근거가 1도 없는 허황된 생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때부터 내 생활은 온전히 줄곧 어떻게 해외로 나갈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방법을 잘 몰랐던 탓에 그냥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외국어만 공부했고, 미군 부대와 봉사활동을 하고, 영어 원어 수업만 골라 들으며 대도 않는 글로벌 타령을 했다. 밥먹듯이 휴학을 하며 돈을 벌고 장학금을 탈탈 털어 호주, 미국, 스페인, 영국까지 매년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웠지만 나는 이기적이고 싹수없게 여윳돈 모두를 내 욕심에만 쏟아부었다. 


그러나 졸업 예정자 앞에 놓인 현실의 장벽은 예상보다 높았다. 내게는 특별한 경험이었지만 사회 먼발치에서 보면 흔한 것이었고, 아무리 자신 있다고 허세를 부려봤자 내 외국어는 통번대에 입학할 수준은 안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잘못 맞춰진 초점에 다른 역량이라곤 없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단순히 해외 기업 채용자 입장에서 나를 보면 이랬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작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모든 학업을 마친 여자 

-특별한 기술도 없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졸업생 

-영어 원어민도 아니고 

-게다가 비자까지 지원해 줘야 하는 무척 귀찮은 외국인 


한국에서도 번번이 고배를 마시는 비이공계 학부 졸업생이 해외에서 일하는 멋진 여자 따위를 꿈꾸다니? 도대체 그 멋진 여자는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나는 그제야 내 목표의 중심이 한국 밖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무엇'에 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질문과 계획을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수정해야 했다. 질문을 바꾸고 나니 해야 할 일들도 바뀌었다. 그리고 몇 년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사랑하진 않지만 꽤 잘하는 일을 회사에서 하고 있고, 생전 관심도 없던 독일이란 나라에서 예상보다 훨씬 오래 살게 되었으며, 좋아하는 글쓰기는 본격적인 취미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독일에 가서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에 나는 영리하게 답할 재간이 없다. 그저 다시 반문할 뿐이다. 

"독일이든, 미국이든, 한국이든 말이에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요?"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자신 있던 가요?" 

"일할 때 무엇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죠?" 

"일할 때 본인을 가장 잘 버티게 해주는 건 무엇이죠?" 

"상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먼저 알아야 그 일을 독일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같이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여담이지만 몇 년 전 이웃집 아주머니가 왜 독일인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물을 때 "독일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살 자신이 없어서요"라고 답했던 적이 있다.  아주머니는 피식 웃으시더니 "어디 사는 게 뭐 그렇게 중요해? 요즘같이 맘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시대에! 장소는 선택이라도 할 수 있지만, 결혼할 인연이란 건 내가 선택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아? 나는 나래 대답이 이해가 잘 안 되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쩌면 이때도 문제의 핵심을 '어디'에만 맞추는 실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고민한다는 건 참, 나이가 들 수록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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