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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종결자 Sep 05. 2018

베를린 장벽만큼 두꺼운 여성 유리 천장 허물기

중2병에 걸려 허우적대던 날 끄적인 다이어리에 적힌 내 꿈은 바로 ‘커리어우먼’였다. 일하는 여성이 여전히 많지 않던 당시에 유행처럼 쓰인 그 단어가 가진 함축적 의미 따위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드라마에서 보는 당당한 독립 여성을 떠올리며 동경했던 것 같다. 여성 앵커, 여 교수, 여 경찰.. 어떤 직업군에도 앞에 남자라는 말은 잘 붙지 않는 걸 보니 일하는 여성은 어딘지 모르게 특별한 느낌마저 들었던 것 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느덧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려 커리어우먼이라는 말이 풍기던 멋지고 쿨한 이미지는 흐려진 반면 애틋함이나 간절함만 더해진 것 같다.


일하는 여성이 평범한 반면, 이 여성 직장인이 중·장년이 될 때까지 일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커리어우먼의 명은 참으로 짧다. 그나마 기업 총수 자녀들을 제외하고 나면 오랜 시간 직업을 유지하며 리더로 성장하는 일반 여성은 미혼인 경우가 많다.

작년에 영국에서 열린 한 '리더십 포럼'에서 무대를 빛내는 5명의 강연자 중 4명이 여자인 것에 행사 내내 부러운 맘이 들었다. 그들이 가진 그 자리와 명예가 부러운 것은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은 뒤에도 치명적인 경력 단절 없이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와 기회, 결혼과 출산이 자신의 커리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자신의 사생활과 사회생활을 원하는 방향대로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신감과 믿음, 그런 환경을 제공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단 것이 부러웠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많이 바뀌었지, 유리 장벽은 옛날이야기야!'라고 자신했던 적이 있었다. 출산 휴가를 꽉 채워 쓴 뒤 직장에 다시 복귀하여 즐겁게 일하고 있는 친구들도 몇 있으니 변화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의 특징이라면 출산 후 2-3개월 만에 직장에 복귀해도 괜찮을 만큼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지원군이 든든하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결혼은 했지만 경력이 단절되는 것이 우려되어 일 조금 더 한  아니면 돈을 조금 더 번 뒤에 아이를 낳기로 계획하거나 출산을 아예 포기했다. 손에 꼽는 투자 은행에서 근무하던 친구는 임신을 하자마자 상사로부터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법으로 보장받는 각종 혜택 외에 복리 후생 다 챙겨줄 테니 임신 후 복귀할 생각 하지 말고 출산 휴가가 끝나면 그만 두라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아이를 돌봐줄 가족이 가까이 없으니 온종일 아이를 돌봐주는 도우미 아주머니 고용을 위해 월급 전체를 갖다 바칠 작정이 아니라면 직장 복귀는 어려웠지만 출산 휴가가 시작되기도 전에 상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너무나 슬펐다는 친구의 말에 가슴이 먹먹했다. 여전히 한국에 있었다면 평범한 직장인인 내게도 언젠가 닥칠 일이었을 것이다. 드라마 미생의 선차장처럼 자녀와 직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끊임없이 맞이해야 하는 것은 적어도 동시대를 사는 한국 여성들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된 경제적 짐을 짊어져야 할 한국 남성들 모두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노여움이 든다.


독일도 여성 직장인들에게 아주 친절한 나라는 아니다. 유럽연합 국가 중 언제나 남녀 임금 격차가 큰 것으로 탑 5에 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로는 고소득 직업 군에 남성이 더 많이 진출한다는 점과 출산 후 경력 단절 또는 파트타임 전환으로 임금이 남성에 뒤쳐진다는 이유 등이 있지만 어쨋거나 독일보다 못산다고 여겨지는 남유럽 국가보다 임금 격차가 크니 본인들도 부끄럽게 여긴다. 또한 여성 리더의 수가 남성에 비해 여전히 매우 적다. 북유럽에 비해 보수적인 사회와 문화 탓에 독일도 우리 부모님 세대까지는 결혼과 출산 후 일하는 직장 여성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통계라면 일하는 여성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 현재는 유럽연합에서 여성 직장인 비율이 3번째로 높은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교해 큰 차이는 기업과 사회의 변화 속도이다. 기업들은 남녀 성비와 임금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고민하고 실천한다. 예컨대 자동차를 제조하는 독일 기업에서는 여성 직원 수를 전체의 35%까지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기도 하고 한 컨설팅 대기업은 여성 관리자의 수를 20%까지 높이겠다고 약속했다.(지금은 고작해야 미미한 한자리 수에 불과하다.) 나아가 현재 재직 중인 직원들이 육아와 일 모두 병행할 수 있도록 재택근무와 유연시간 근무제, 파트타임 근무 전환 제도를 적극 장려한다. 무엇보다도 경력이 조금 단절된 여성이 다시 복귀하거나 재취업을 할 때에도 혼인 여부와 자녀 존재 여부가 불리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미 자녀를 다 낳아 버린 직원이 기업의 입장에선 더 편하다는 이야기도 한다. 재취업을 하는 여성은 업무 만족도가 더 높은 경향이 있고, 이미 출산이라는 고비를 한 번 넘긴 사람이니 가까운 미래에 출산을 이유로 공백기를 가질 확률이 무자녀 직원에 비해 낮기 때문이란다.


출산율이 급격히 낮아진 것도 여성 직장인 권리 강화에 한몫을 했다. 출산 장려를 하려니 남녀 모두 출산 휴가를 받을 수 있도록 법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여성에게는 출산 전 6주, 출산 후 2개월, 남성에게는 출산 후 2개월을 의무 유급 휴가로 준다. 이후에는 원하면 1년에서 최대 3년까지 복직이 보장된 육아 휴가를 받을 수 있다. 그 덕에 출산 휴가를 2년 가까이 쓰고 복직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임신을 하여 휴가를 쓰는 직장인도 더러 있다. 연이은 임신이 얄밉긴 해도 싫은 소리로 나무라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휴가 기간 동안 회사는 보충 인력을 제공하므로 일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에게 비슷한 경우가 생겼을 때도 동일한 권리를 기대할 테니 말이다. 그저 모두가 이용하는 시스템일 뿐, 누가 어떻게 이런 시스템을 이용하는지는 논쟁거리가 되어선 안된다. (물론 업무 수습 기간인 첫 6개월에 임신을 한다거나, 교사 임용 후 줄지은 임신으로 몇 년째 일은 하지 않고 월급만 받아가는 사람들을 험담하는 건 본능이다.)

 

우리나라의 대기업들도 발맞추어 변화의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대다수의 기업들은 여성 직원 채용도, 출산한 여직원의 업무 복귀도 꺼려한다. 평등이니 여성을 향한 유리 천장이니 말이야 다 맞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아직 어려움이 있다고 자꾸 뭉개 버린다. 결혼한 남성은 가정을 책임져야 하므로 회사에 더 충성할 테지만 결혼한 여성은 가정을 돌보느라 일을 소홀히 할 것이라는 낡은 노파심 때문일까? 직원이 다문 3개월이든 2년이든 일을 쉬는 동안 감을 완전히 잃고 복직 후 업무에 적응을 못할까 걱정이 되는 걸까, 아니면 출산 휴가기간 고용된 계약직 직원이 일을 못할까 걱정이 되는 걸까? 여성 직원이 출산 후에도 멋진 중년의 여성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기업과 사회 모두에게 너무 큰 비용을 부담시키면서 효과는 기대할 수 없는 과잉복지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나는 독일보다 한국에서 더 오래도록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남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 나면 금세 자신이 없어진다. 나는 여전히 쉽게 대체 가능한 직장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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