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들이 필요로 하는 사적 공간의 최소 범위는 매우 넓다. 넓은 땅에 작은 인구라는 좋은 환경에 익숙한 탓에 북적대는 공간이나 낯선 사람과의 신체 접촉을 무척 못 견뎌한다. 지연된 기차나 엘리베이터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나라라면 다음 전철이 3분 뒤에 오든 10분 뒤에 오든 마치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듯 꾸깃꾸깃 마지막 사람까지 몸을 밀어 넣을 테지만 독일에서는 어느 정도 꽉 찬 지하철에 누군가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면 바로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더 들어올 공간 없으니 다음 것 기다리라고!". 엘리베이터 역시 최소 5명은 더 탈 수 있을 것 같은데도 기다리던 사람은 다음 엘리베이터를 탄다며 그냥 보내버린다.
독일 사무실은 이런 독일인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한다. 즉, 직원 한 사람에게 주어진 업무 공간이 정말 넓다. 한 평의 여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나 한 듯 사무실 전체가 빼곡히 채워져 있는 곳에서 근무하다가 온 내게 마치 공간의 사치와 다름없었다. 뮌헨에서 근무할 당시, 신규 직원 두 명에게 내어줄 자리가 없어 임시로 회의실을 쓰게 하고 사무실 확장에 대한 논의를 하던 때가 있었다. 때마침 한국 본사에서 온 CEO가 방문하였는데 "사무실이 이렇게 천국같이 넓고 공간이 많은데 무슨 확장이야. 한 책상에 네 명은 앉을 수 있겠다. 독일 직원들이 복이 터졌네"라고 불평 아닌 불평을 토로했던 적이 있다. 독일인 법인장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긴 했지만 바로 그 상황이야말로 독일인과 한국인의 공간에 대한 인식 차이를 확실히 느끼게 해주는 계기였다.
우리나라 회사는 대부분 커다란 공용 공간에 개개인의 책상과 의자, 개인 사물함을 나란히 줄지어 놓는 도서관 같은 구조로 꾸며져 있다. 이런 곳에서는 어디에 누가 있는지, 그가 무엇을 하는 지도 아주 잘 보일뿐더러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도 잘 들린다. 그래서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만의 공간이란 건 사실 없다. 드라마에서 보듯 비밀스러운 통화를 하기 위해선 건물 옥상과 복도, 화장실을 효과적으로 이용해야만 한다. 내가 다니던 한 회사는 건물을 더 이상 증축할 수 없어 제한된 공간에 책상만 자꾸 더 놓는 바람에 다리 스트레칭을 위해 뒤로 의자를 쭉 빼는 것조차 눈치가 보이는 형편이 되었다. 옆 사람이 채팅창에 쓰는 글씨 하나하나도 살짝 고개를 돌리면 다 보일 정도. 게다가 담배 피우고 커피 마신 상사가 옆에 앉아 통화를 하면 그 입냄새마저 고스란히 옆 사람에게 전달되는 공간 효율의 최고봉이었다.
이런 공간의 가장 큰 장점은 빠른 소통이다. 본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바로바로 실무자를 불러내고 다른 직원들을 감시할 수 있다. 이 블록은 영업팀, 저 블록은 마케팅팀 이렇게 한눈에 구분이 되어있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저 팀은 분위기가 어떤 지 눈치 9단으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는 고작 인사만 나눈 사이지만 매일같이 듣는 그분의 한숨 소리와 혼잣말에 익숙해져 왠지 나도 모르게 정이 간다. 오픈된 공간에서는 전화가 울리면 온 동네 다 들려 내 전화라면 한 번에 잽싸게 받고, 다른 사람 전화라면 팀의 막내가 눈치껏 빠르게 당겨 받아야 한다. 전화가 세 번 이상 울리도록 그냥 둔다는 것은 "야 거기 누군데 전화를 안 받아!" 하는 부장의 크고 우렁찬 목소리에 잠 한 번 깨보고 싶다는 용기이다.
독일에도 오픈 스페이스를 선호하는 회사들이 많다. 그러나 개별 공간이 한국에 비해 많이 넓어 독서실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최근 사무실의 트렌드는 직원 개개인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개별 공간을 최대한 제공함과 동시에 브레인스토밍, 회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별도로 마련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내가 근무하던 회사는 두 명이 하나의 사무실 방을 나누어 쓰도록 설계되어 있고 각 층마다 직원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회의실과 카페가 여러 곳 있었다. 건물 외벽이 온통 통유리로 되어 있어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맞은편 건물의 직원들이 어떤 자세로 일을 하고, 누가 복도에서 뛰어가는지가 훤히 보이지만 옆 방에 있는 같은 팀 동료들이 무엇을 하는지, 누가 자리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편으로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적인 공간이 완벽히 보장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런 사무실에서는 아무도 함부로 내 공간과 시간을 침범하지 못한다. 각자의 방에서 근무하면 "나래 씨~"하면서 사전 약속 없이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급한 업무라면 노크를 하고 상대의 방에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팀장과의 커뮤니케이션도 급한 것이 아니면 대게 미리 약속을 잡고 미팅 형식으로 진행한다. 다른 사람의 전화는 물론 받을 필요 없다. 다른 방에 있는 팀원들이 얘기를 하고자 우리 방에 들어올 경우 문을 닫고 이야기를 하면 완벽히 비밀도 보장된다. 사무실에 놓고 가는 나만의 간식이나 사무용품을 누군가에게 뺏길까 우려할 일도 없다. (이깟 게 뭐라고! 할 수 있지만, 사무실 간식 좀도둑은 정말 흔한 적수다!)
다만 이런 사무실에서는 소통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다른 동료들과 자주 부딪힐 일도 없고 눈 마주칠 일도 없어 복도에서 오다가다 자주 만난 것 같은데 1년 내내 어느 부서에서 일하는지 알 길이 없다. 옆 방에 있는 영국 직원은 어떤 팀 소속인지 무척 궁금하지만 매일 문을 닫고 업무를 하거나 자리를 비우니 말을 걸기가 조심스럽다. 전화나 이메일로 연락이 빨리 닿지 않는 직원들은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는 것이 좋을 때가 많은데 왠지 그 직원의 공간에 침범하는 느낌이 들어 소극적이게 된다.
이런 구조에서 한국의 관리자들은 불신과 불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이 자식, 전화도 안 받고 문 닫아 놓고 인터넷 쇼핑만 하는 거 아니야?', '저거 저거 전화하면서 자꾸 웃는 거 보니 와이프랑 통화하는 거 아니야?' 라며 말이다. 독일인이라고 물론 자기 직원을 무한 신뢰하지는 않는다. 독일 상사들도 직원들이 하루 8시간 온종일 일에 집중할 것이라는 믿음은 없다. 아마 누군가는 닫힌 방 안에서 편안히 아마존 쇼핑도 하고, 전화기를 붙들고 사적인 잡담도 늘어놓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주어진 업무를 어디서 어떻게 처리하는 가는 결국엔 본인의 판단과 재량에 달려 있다는 가치관은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