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부장: 자 이번 주에는 별다른 공지 사항은 없고~ 사장님께서 특별히 우리 팀 프로젝트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계시니 이 건에 모두 집중하도록 해. 프로젝트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얘기해볼까?"
김 대리: 네, 지난번에 보고 드린 대로 프로젝트는 본래 일정에 맞추어 잘..
오 부장: 일정이 어떻게 되더라? 그 내가 말한 그 에이전시는 연락해봤어? 이런 건 되도록 에이전시한테 맡기는 게 좋다고 검토해 보라고 했잖아.
김 대리: 네, 검토해 봤는데 저희가 그 에이전시 관련 자료를 좀 찾아보니까..
오 부장: 자료 줘봐.
김 대리: 아 제가 회의 끝나고 이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오 부장: 회의 전에 그런 것부터 프린트를 해야지 뭐 하고 있어? 박 사원, 지금 나가서 프린트 해와.
그럼 이거 말고, 다들 이 프로젝트 홍보 전략은 생각해봤나? 한 번 아이디어 얘기해보지.
(모두 침묵) (휴대폰 진동 소리)
왜 다들 말이 없어? 여태 생각도 안 해 봤어?
...
얼마 전 여느 웹드라마에서 본 회사 회의 모습이다. '요즘 누가 저래~?'라고 할 법 하지만 사실은 하나도 과장되지 않은 익숙한 장면이었다. 회의만 잡히면 부담스러워하는 직원들, 자유롭게 말하라고 해 놓고선 자꾸만 딴지 거는 상사, 가급적 침묵하거나 상사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며 어서 빨리 회의를 끝내려는 참여자까지. 다양한 의견과 정보를 나누어 업무를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인데 여전히 우리 내 회의는 권위적인 상사가 수동적인 직원에게 일방적으로 묻고 말하는 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식 조직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내가 독일 회사에 온 이후 가장 피곤함을 느꼈던 부분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하는 문화였다. 독일인들은 일상에서나 회사에서나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어려서부터 교육 과정에서 이런 훈련을 받아서인지 독일인들은 참 말을 잘한다. 아 물론 언제나 논리 정연하게 말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데 겁이 없고, 말이 참~~ 많다. CEO와의 점심 식사와 같은 불편한 자리에서도 조직에 대한 자신의 불만이나 개선 사항을 편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또 상대의 말을 잘 듣는다. 누군가 말을 할 때는 웬만해서는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끼어들지 않는다. 끼어든 사람이 아주 높은 상사라도 "죄송합니다만, 제 말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요."라고 당당하게 잘라버린 뒤 자신이 할 말을 다 뱉어 낸다.
독일 회사에서 직원들은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 브레인스토밍이나 협업이 필요한 경우 관련자들을 소집하여 다양한 방식의 회의를 진행한다. 그래서 본인이 잘 알지 못하는 동료에게 느닷없이 회의 초대를 받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초대를 받았어도 본인이 생각하기에 어젠다가 자신과 큰 관련이 없거나 중요도가 떨어진다 생각되면 정중히 참석을 거절하거나 다른 사람을 추천하면 된다. 회의에 참석을 했지만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판단이 들면 말없이 회의가 끝날 때까지 투명인간 참석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이야기하고 중간에 회의장을 나간다. 마치 '의견이 없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어'라고 말하는 듯한 회의 분위기에 참석자는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게 된다.
업무 배분도 마찬가지다. 그냥 주어진 일이란 건 별로 없다. 팀의 비전에 따라 어떤 업무를 통해 그 비전을 성취할 것인지 논의하고, 그중 가장 타당한 몇 가지 업무를 주요 업무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각 각의 업무들을 하고 싶은 사람과 잘할 수 있는 사람을 고려하여 상호 합의 아래 담당자를 정한다. 담당자는 업무를 구체화 한 뒤 팀장, 예산을 쥐고 있는 의사 결정자, 그리고 연관된 부서의 동료들을 설득하며 업무를 끌고 나간다. 행여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업무가 주어졌다면 군소리 없이 잘 해낼 것이 아니라 해당 업무를 지시한 사람과 본인 중 누구 하나가 상대에게 설득당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 일을 성공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책임지는 자신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없이 순종적으로 업무를 맡아 놓고 나중에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저는 이렇게 하기 싫었는데, 위에서 시켜서 한 겁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독일 회사들이 내놓은 구인 광고를 보면 거의 대게 지원자 자격 항목에 '의사 결정자를 설득하는 능력'. '협상 능력', '모든 직급과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면접에서도 이 능력을 검증하는 질문을 많이 던진다. '상사가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업무 지시를 내리거나 의견을 제시한다면, 그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복잡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의사 결정자를 효과적으로 설득한 사례를 예로 들고 당신이 사용한 전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와 같은 질문이다.
연봉 협상을 할 때, 업무 성과 평가 기준을 작성할 때야말로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야 하는 순간이다. 어떤 항목으로 본인을 평가해야 가장 합리적 일지 미리 생각한 뒤 상사와 면담을 한다. 상사는 직원이 낸 평가 항목과 비율이 이해할 수 있는 선이라면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다. 상사의 결론에 동의할 수 없으면 그냥 수긍할 것이 아니라 다음번 협상의 밑밥을 깔기 위해서라도 합리적인 근거들을 모아 몇 번이고 상사와 다시 논쟁을 벌여야 한다. 합리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평소에 해야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을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독일 직원들이 가장 잘 하는 것 중 하나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홍보하고, 기업 내부 홈페이지에 성공한 프로젝트를 광고하고, 또 그런 사례를 소개하는 발표 자리를 직접 만드는 식이다. 맡은 일을 '묵묵히' 잘 해내고 누가 알아주면 '조용히' 기뻐하는 착한 직원은 열심히 해 놓고도 기대한 만큼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셀프 홍보야 말로 독일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이 꼭 가져야 하는 능력이다. 여전히 셀프 홍보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