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글을 쓰게 하는 책과 글을 못쓰게 하는 책이 있다. 어떤 책들은 너무 훌륭해서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다면, 내가 글을 쓸 이유가 없다고. 내게 기성 작가들을 뛰어넘을만한 천재성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우연히 알게 된 책,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는 나를 글 쓰게 했다.
나는 ‘타이탄의 도구들’이라는 책으로 셰릴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이미 유명한 작가였고,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독자들을 위해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꺼낼 수 있는 '주제'를 모아 해당 책에 실었다. 나는 이후 셰릴의 가장 유명한 책인 ‘와일드’를 도서관에서 빌렸다. 와일드는 그의 고통스러웠던 인생 여정을 담아낸 에세이였고, 나는 한 사람의 인생에 완전히 빠져든 채로 발을 동동거리며 읽었다. 그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셰릴의 글은 특별했다. 나는 책을 덮고 여느 때보다 강렬하게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나도 이만큼 잘 쓸 것 같다는 이상한 자신감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셰릴은 마치 내 이야기만큼이나 너의 이야기도 가치 있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였다.
나만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셰릴은 실제로 미국의 많은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셰릴의 글쓰기 주제와 그녀의 강연을 따라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렇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셰릴이 '타이탄의 도구들'에서 제안한 글쓰기 주제로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매주 2~3페이지 분량의 글을 썼다. 고갈되어 버릴 줄 알았던 내 이야기가 모든 주제를 끝내고도, 마르지 않았다. 나는 살아가는 한 계속해서 할 말이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1년이 넘도록 매주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이십 대 중반에 떠난 유럽여행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 하나였던 G는 밀라노의 한 호스텔에서 휴학생이었던 내게 한국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원래 귀국 후, 정신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대기업에 취직할 준비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 달간의 여행으로 나는 여기저기를 떠돌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나는 G에게 즉흥적으로, 이미 유명한 그런 사람들 말고 나처럼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매거진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G는 아주 멋진 생각이라고 꼭 해내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매거진을 만들지 못했다. 대신 내 시집을 만들었고, 50부를 인쇄해 일부를 독립서점에 판매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궁금해했던 것도 맞지만, 사실은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어린 시절의 습작 이후로 제대로 된 글이 없었다. 물론 글을 썼지만, 그건 고여있는 피지가 툭하고 모공을 뚫고 나오는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튀어나온 것들로 시집을 만들었고, 때때로 그때를 회상하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유명하지 않은 내 이야기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나는 내가 셰릴을 통해 글 쓸 용기를 냈듯 다른 사람에게도 용기를 주고 싶다. 누구의 이야기와도 겹쳐지지 않는, 그대밖에 그대의 인생을 살지 않았기에 특별한, 이야기들을 종이 위로 옮기는 용기를 나눠주고 싶다.
셰릴은 글을 쓸 때 중간에 끊지 않고 종이에 직접 손으로 쓸 것을 권했다. 이 방법은 실제로 내게 효과가 좋았다. 심지어 나는 볼펜을 사용해 지울 수도 없게 글을 썼고(정 마음에 안 드는 건 밑줄을 그어 까맣게 만들어 버렸다), 문장이 이상하건 말건 일단 떠오르는 말들을 써 내려갔다. 그때 내게 중요한 건 내가 글을 ‘잘 썼냐’가 아니라 ‘썼다’에 있었다. 나는 몰스킨 노트 한 권을 내가 손수 쓴 글로 꽉 채웠고, 그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느리지만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은 큰 기쁨이 되었다.
나는 앞으로 몇 주간 내가 셰릴의 주제에 따라 쓴 글들을 연재할 예정이다. 나는 이 주제를 따라 글을 쓰면서,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나와 더 친해졌다. 이 브런치북의 제목이 ‘날 무너뜨리는 글쓰기’가 된 이유는 셰릴의 말 때문이다.
내 마음을 무너뜨리고(부수고), xxx처럼 쓸 것.
기꺼이 내 마음을 무너뜨릴 작정으로, 어딘가 잘못된 사람처럼 정신 놓고 글을 썼지만 결국 그건 내게 가장 다정한 글쓰기가 되었다. 무너질 것 같았던 마음이 따뜻하게 채워졌다. 주저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썼던 셰릴의 정신을 이어받아, 아무것도 아닌 내가 글 쓸 용기를 냈듯이 당신도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