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호미 Jun 22. 2024

도둑맞은 자전거를 동네에서 발견했다

끝까지 찾지 못한 잃어버린 물건에 대해 써라




겨우내 빌라 주차장에 세워둔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같은 동네 다른 건물 주차장에 세워진 내 자전거를 발견했다. 틀림없는 내 자전거였다. 나는 이 도둑에게 모욕을 주고 싶어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7살 무렵 사촌오빠에게 처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오빠는 확실하게 자전거를 배우려면, 내리막 길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집 근처 시멘트로 포장된 내리막길에서 나는 자전거를 배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완만한 경사였지만, 오빠가 뒤에서 나와 자전거를 밀어버린 순간 나는 살기 위해 발을 굴렀다. 


어렸을 때 사진을 보면 나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거나, 안전을 위해 보조바퀴 두 개가 뒷바퀴에 달려 있는 네발 자전거를 타고 있는 내가 자주 보인다. 하지만 바퀴 두 개만 달린 자전거는 그 내리막길이 처음이었고, 나는 다행히 다치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데 성공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바람의 저항으로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기분. 그게 내가 자전거를 좋아하게 된 이유였다.


자전거는 하체 힘을 많이 써야 하지만, 속도를 조절하며 주변을 감상하기엔 제격이다. 그렇게 바람을 가르는 기분을 즐겼던 건 대학교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다닐 때 나의 생활 반경은 버스를 타고 다닐 만큼은 넓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곳을 걸어서 다니기엔 애매하게 넓었다. 학교와 자취방, 아르바이트하던 곳을 땀 흘리며 오가던 나는 어느 날 문득 자전거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학생인 내가 새 자전거를 구매하기엔 부담이 되었고, 그 당시엔 당근으로 중고 거래를 쉽게 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빠에게 집에 사용하지 않는 자전거가 있냐고 물었다. 아빠는 막내가 쓰던 자전거가 있다며,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다소 촌스러운 오렌지 색의 미니벨로 자전거를 가지러 갔다. 새로 사면 15~20만 원 정도 했을 삼천리의 미니벨로 자전거는 집 마당 한편에 세워져 있었다. 막내는 바퀴가 작은 자전거라 발을 자주 굴려야 해서 타고 다니기 싫다고 했다. 나는 어쩐지 그 말을 들으니 자전거가 불쌍해져서 내가 꼭 이 녀석을 잘 타고 다니리라 다짐했다.


먼지가 쌓여있던 자전거 구석구석을 걸레로 닦았다. 본가에 있던 장비들로 자전거 바퀴에 바람도 채우고, 체인에 기름도 칠했다. 이제 이 자전거를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자취방으로 옮기는 일만 남았다. 나는 버스 대신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자전거를 기차칸에 들고 타면서부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 무거운 걸 가져가겠다고 했을까. 게다가 도착해서 자취방까지는 어떻게 이동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결국 반으로 접혀 굴리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택시나 버스에 들고 타는 것보다 직접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버스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만, 자전거가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가니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고, 바람을 맞으며 달리니 기분도 좋아져 버렸다. 그 이후로 오렌지 녀석은 나와 여기저기를 함께 다녔다. 


사실 내가 대학을 다녔던 도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진 않았다. 그래도 날씨가 춥지 않은 초가을까지는 'OO대 손예진'이라는 친구들의 놀림을 들으면서도 자전거와 함께 다녔다. 한 겨울이 되자, 녀석을 주차장 한편에 세워두었다. 그리고 두꺼운 잠금장치까지 걸어두었던 녀석이 어느 날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공공장소에 떨어진 가방과 지갑, 휴대폰은 안 가져가면서 길에 세워둔 자전거는 온값 부품을 빼가는 엄복동의 나라. 내가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지 잊었던 걸까. 낡고 촌스러워서 아무도 가져갈 것 같지 않았던 내 자전거를 도둑맞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몇 개월간은 세워두기만 하고 잘 들여다보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아무나 가져가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이후로 지나가면서 같은 모델의 자전거를 보면, 혹시 내것은 아닌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나만 아는, 미세한 스크레치의 위치가 달랐다. 나의 오렌지 녀석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의 1년이 지날 무렵, 나는 습관처럼 길에 세워진 오렌지색 자전거를 보다가 발견해 버린 것이다. 


앞쪽에 새로 바구니를 달았지만, 틀림없이 그 녀석이었다. 스크래치 하나하나가 똑같았다. 마치 도둑맞은 걸 알아차린 그날처럼 나는 분노에 휩싸였다. 나는 곧장 자취방으로 달려가서 노트 한 장을 찢었고, 거친 글씨체로 쪽지를 썼다. '남의 자전거 훔쳐타니 기분이 좋더냐'는 비난의 쪽지였다. 쪽지를 자전거 바구니에 던져놓고 집으로 돌아오니, 욱했던 성질이 가라앉았다.


이성을 되찾은 나는 자전거의 새 주인이 녀석을 정당하게 중고로 구매한 사람이거나, 선물 받은 사람이었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도둑맞은 자전거를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 도둑이라는 건 아니니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자전거가 세워져 있던 곳으로 돌아갔지만, 이미 자전거는 떠나고 없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더 이상 오렌지 녀석과 같은 모델의 자전거는 길에서 볼 수 없지만, 비슷한 크기나 디자인의 자전거를 볼 때마다 나는 그때를 상기하곤 한다. 내가 할 수 있었던 모든 비난과 비아냥을 담은 그 쪽지의 내용이 생각나 부끄럽지만, 사실 그때 나는 누군가에게라도 화를 내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끝까지 찾지 못했던 잃어버린 물건은 자전거가 아니라 자전거와 함께 바람을 가르며 누린 내 기쁨들이었다. 마치 자전거가 없으면 절대로 누릴 수 없다고 착각했던 그 기쁨. 내 기쁨을 앗아가 버린 것에 대한 분노를, 어린 나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지금 자전거가 없지만, 언제든 기분이 내키면 서울시 공공자전거인 따릉이를 빌린다. 특히 나는 노을이 질 무렵에 망원 한강공원이나 난지캠핑장 주변을 달리는 걸 좋아한다. 한강 너머의 빌딩들이 노을을 받아 황금빛으로 바뀌는 순간은 늘 아름답다. 나는 오렌지색의 자전거를 되찾지 못했지만, 황금빛의 기쁨을 누리는 나는 되찾았다. 스스로는 잊을지언정, 다른 사람이 훔쳐갈 순 없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다.




이전 04화 결혼식에 주황색 바람막이를 입고 간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