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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호미 Jun 19. 2024

결혼식에 주황색 바람막이를 입고 간 이유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던 일에 대해 써라





나는 이모의 결혼식에 형광주황색 바람막이 점퍼와 흰색 7부 바지를 입고 갔다. 그리고 결혼식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이모는 타고난 사기꾼이었다. 이모는 아주 사소한 거짓말에 능숙했다. 그리고 그런 거짓말들은 대화를 즐겁고 단순하게 만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에게 들은 모험담의 상당수가 거짓인걸 알았을 때의 충격은 상당했다. 나는 그런 사기꾼 이모를 때론 큰 언니처럼, 때론 엄마처럼 여기며 자랐다. 우리의 관계는 3촌이라는 촌수보다는 더 가까운 것이었다.


이모가 19살에서 20살 무렵, 내가 태어났다. 나는 외가 친척들이 많은 동네에서 유아 시절을 보냈다. 역시 가깝게 살았던 이모는 자주 나를 업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고 했다. 감사하게도 동네 주민들이 어린 나를 귀여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모는 마치 수금을 하듯 이곳저곳의 가게를 들러서 사탕이며 과자를 받아왔다. 누군가 아기가 참 예쁘다고 하면, 이모는 자길 닮아서 그렇다고 했다. 아기 엄마냐는 질문에 부정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콩깍지가 쓰여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렇게 동네방네 자랑하고픈 이모의 첫 조카였다.


내가 3-4살쯤, 우리 가족은 서울을 떠났다. 내가 글을 써서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후부터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문자도, 이메일도 아닌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였다. 편지지를 봉투에 담아, 구멍가게에서 파는 우표를 사고 아무 우체통에나 넣으면 되는 거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받은 편지를 모두 보관해 왔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 받은 편지의 대부분은 이모가 보낸 것이었다. 심지어 이모는 거의 모든 편지지를 직접 만들었는데, 꽃을 접어 모서리에 붙이거나 반짝거리는 풀로 장식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편지 봉투를 열어보니, 편지와 반지 3개가 들어있었다. 당시 나는 여동생이 둘이었기에, 나눠 가지라고 선물을 보낸 것이었다. 이모는 편지에 '새끼들이 많으니 돈이 배로 든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런 이모만의 애정표현을 듣고 자랐다. 편지의 주 내용이 엄마 말을 잘 들으라는 말이었음에도 나는 이모의 편지를 기다렸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펜팔 친구였다.


그러다 우리는 룸메이트가 되었다. 이모가 결혼을 해서 이사를 나갈 때까지 우리는 2-3년간 같은 방에서 생활했다. 이모는 이즈음 우리 자매들에게 사기를 많이 쳤다. 자신이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며, 이런저런 말들을 해주고 박수를 치며 신기해하는 내 반응을 즐겼다. 중국말도 할 줄 아냐는 나의 질문에 능청스레 엉망진창 중국어를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 자매는 심지어 이모를 위한 재산 분할을 약속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기도 했다. 나는 그래도 재산의 삼분의 일을 양도한다고 했지만, 어린 동생은 전재산 양도 각서에 지장을 찍었다. 이모는 그 각서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이모는 나에게 자잘한 사기를 많이 치긴 했지만,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나와 열심히 놀아줬다. 이모는 나와 공기놀이도 해야 했고, 내 노래도 들어줘야 했고, 내가 쓴 소설도 다 읽고 평가해줘야 했다. (남자 주인공을 자꾸 병으로 죽여버리는 탓에 이모는 내게 사람 좀 그만 죽이라고 했다, 그 시절 남주의 죽음은 클리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는 선을 봤고, 같은 동네에 담장이 예쁜 집을 갖고 있던 아저씨와 결혼을 한다고 했다.


이모의 신혼집은 걸어서 겨우 7분 거리였지만, 나는 왠지 이모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모에겐 경사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7가지 정도의 결혼 선물을 준비했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어른들 입장에선 하등 필요 없는 그런 것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중에는 전지 사이즈의 아주 긴 편지도 있었다. 




대망의 결혼식은 아마도 어느 토요일 오전이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토요일에 직장도, 학교도 가지 않지만 그땐 토요일에도 학교에 갔다. 그날 아침, 나는 당연히 내가 결혼식에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자식 넷을 모두 데리고 다니기엔 부담스러웠던 건지, 가족 행사보다 학교에 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건지 나를 학교에 보냈다. 나는 왜 나만 결혼식에 못 가냐며 울고불고 따지다,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학교에 갔다. 


마음이 약한 우리 엄마는 결국 학교에 전화를 했고, 교무실로 걸려온 전화 덕에 나는 결혼식에 갈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옷을 갈아입을 시간은 없었고, 결국 나는 이모의 결혼식에서 신부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이 되었다. 이상한 건 이모를 포함한 모든 어른들이 내 옷 색깔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게 일회용 카메라를 주며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나는 형광 주황색의 바람막이를 입은 채로 과감하게 결혼식장을 활보하며 이모의 얼굴을 찍었다. 내가 찍은 사진에는 내가 없지만, 공식적인 결혼식 사진에는 그날의 내가 남아있다. 나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눈을 질끈 감고 싶어 진다. 


나는 이제 너무 머리가 커버려서, 이모의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그래도 이모는 여전하다. 유일하게 나를 '이 새끼야'라고 부르는 사람이자, 나의 두 번째 엄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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