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일에 대해 써라
커피를 홀짝거리며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평소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는 받지 않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의 그는 자신을 택시기사로 소개한 후, 내게 콜택시를 부르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니라는 내 대답에도 기사님은 재차 확인을 했고, 번호를 잘못 아신 것 같다는 내 말에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나고, 같은 번호로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고민 끝에 전화를 받았다. 기사님이 아직도 콜을 부른 승객을 못 찾아 헤매고 있는 거라면, 그런데 또 번호를 착각한 거라면, 내가 전화를 받아서 아니라는 말을 해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기사님은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콜택시를 불렀으면 불렀다고 하면 되고, 취소하고 싶으면 취소해 달라고 하면 되지. 왜 거짓말을 하냐.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살지 마라' 등의 말들을 뱉어 냈다.
나름 좋은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던 나는, 뭐라 해명할 틈도 없이 기사님의 분노를 뒤집어쓴 신세가 되어버렸다.
나는 사실 화를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주변에 화를 아주 많이 내는 사람과 화를 전혀 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후자의 성품을 높이 샀다.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화가 나지 않는 초연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온갖 규칙으로 가득한 기숙형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전까지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나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씻고 밥을 먹고 공부해야 하는 기숙사 생활을 힘들어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억압받았다고 느꼈던 만큼, 대학생이 되어 내게 주어진 자유는 벅찬 것으로 느껴졌다.
그때 나는 주도적으로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를 되찾았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렇기에 내 선택이 하나라도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컸다.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만한 친구를 사귀고, 안전한 남자와 연애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의 스펙을 쌓으면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마련하는 이 모든 것이 내 계획대로 순조롭게 이뤄지길 바랐다.
그때의 나는 계획이 틀어지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화를 냈다. 개봉을 기다리던 영화를 예매한 후 극장에 갔다가, 내가 시간을 착각 한걸 알았을 때 나는 화가 나서 우산을 바닥에 내리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화낼 일이 아니었다.
20대 중후반이 되자 나는 그런 내 모습이 싫어졌다. 내가 닮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들의 안 좋은 모습이 내게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지금의 반려인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분노를 표현하지 않는 차분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모든 일에 화를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몇 년간은 대단히 성공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사실 나는 화가 나지 않는 게 아니라, 화를 억압하며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대놓고 드러내진 않으려 했기 때문에 나는 치사하게도 우회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만난 상담 선생님은 화를 '내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거나, 공격받았다고 느낄 때 나아가 학대받는 상황에 놓였을 때 발현되는 감정'이라고 설명했다. 화가 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기전을 깨닫고 화를 인정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해 온 '화'를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인정하면, 마치 화에 사로잡힐 것 같았다. 그리고 화를 내는 내 모습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내 모습 중 하나였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도움을 주었고, 나는 조금씩 내 감정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택시 기사님의 분노는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되었다.
택시 기사님이 분노로 차서 내게 쏟아붓던 말이 어느 정도 끝날 무렵, 나는 그럼에도 정중하게 내 입장을 설명하려 했다. 기사님은 강원도에 있는데, 서울에 있는 내가 그쪽으로 택시를 부를 일이 있겠냐며 전화번호를 잘못 아신 거라고.
그러나 기사님의 분노는 반복되었고, 나도 결국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정중했던 말투는 저고리 품에서 꺼낸 단도처럼 날카로워졌다. 기사님은 여전히 화를 내며 '콜택시 회사에 전화해서 당신 번호가 남아있는걸 내가 다 확인했다, 기록에 다 남아있는데 어디서 발뺌을 하냐'고 했다. 나는 '그래서 기사님이 알아낸 번호가 몇 번인데요?'라고 따졌다. 그가 기가 차다는 듯 '공! 일! 공!' 하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외친 전화번호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경멸을 섞은 말투로 '기사님 휴대폰에 찍혀 있는 제 번호는 몇 번인지 확인해보시라'고 했고, 잠시 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의 한숨이 들려왔다.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은 채 한숨만 쉬고 있는 기사님에게 나는 '일처리 똑바로 하시라'고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온몸이 심장 박동으로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이가 나보다 많은 어른인데 내가 화내지 말고 참을걸', '괜히 화를 내서 일을 키운 것 같아', '왜 방금 화를 참지 못하고 욱해버렸던 거니' 등의 나를 질책하는 말이 마음속에서 쏟아졌다. 나는 자연스럽게 나를 벌주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질책 대신, '방금 전의 상황이 정말로 화를 내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걸까?', '나는 왜 화를 내면 안 된다고 느꼈을까?' 하는 질문들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그에게 낸 화는 정당한 것이었다.
나는 좋은 마음으로 시간을 내서 전화를 받았는데, 내게 돌아온 것은 무차별적인 분노였다. 마치 나는 웃는 얼굴로 길을 알려주려 했는데, 길을 헤매던 사람이 내게 주먹을 날린 격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고, 내가 가진 방패로 최대한 방어해보려 했다. 그러나 분노의 창은 내 방패보다 강했기에, 나는 칼을 꺼내든 것뿐이다. 그의 분노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최선을 다해 나를 지켜냈다. 전화를 끊고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내게 잘못한 사람에게 적절한 사과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맑아졌다. 만약 내가 기사님에게 화를 내지 않았거나, 당황해서 중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면 오랫동안 괴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나를 위해 옳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때때로 내가 공격받았다고 느끼거나 위험하다고 느끼기에 발현되는 화가 '과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화는 언제나 그만큼 크게 일어난 이유가 있다. (택시 기사님도 나름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내 화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사과할 책임이 있듯, 스스로의 화를 인정해 주고 이유를 물어봐줄 책임도 있다.
사실은 언제나 화가 많았던 나의 목표는,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으면서 동시에 나를 지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과 내게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때마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일 또한 나를 위해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