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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omestories Nov 22. 2020

우리의 삶이 춤이 된다면


22살의 호주, 멜버른, 펭귄 아일랜드.

대학교 2학년 때 꼬박 일 년을 준비해서, 호주로 떠났다. 지금이라면 옳다구나, 신나게 즐겼을 텐데 그때는 겁이 많아서 막 성인이 된 동생을 불러서 같이 호주 생활을 마감할 때쯤 열심히 모아둔 생활비로 살고 있던 시드니에서 남쪽으로 호바트와 멜버른으로 친하게 지내던 언니 두 명과 넷이서 마지막을 기념하는 여행을 했다.


여행 책자에서 세상에서 제일 작은 페어리 펭귄이 매일 저녁 둥지를 찾아 떼로 걸어가는 그 귀여운 사진 한 장에 이것은 꼭 봐야 해! 하면서 우리의 여행지는 자연스레 멜버른으로 결정되었다. 오전 10시쯤 시작해서 저녁 9시까지 하이라이트인 펭귄을 보기 위해 투어 버스를 타고 중간중간 내려 동물원도 가고, 국립공원도 가는 당일치기 투어 코스였는데, 이동 중 작은 마을에 내려서 15분 정도 쉬는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버스에 탑승해야 했을 때였다.


여행의 총무로서 하루에 사용할 여행 경비 계획을 세워놓고 사용하고 있었는데, 여행 막바지라 경비에 여유가 좀 있어 각자 10$ 내에서 기념할 만한 물건을 사자고 제안했다. 그때 마침 내 눈에 띈 것은 그 동네의 작은 빈티지 가게였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10분, 옷들이 겨우 걸려있는 것 같이 빽빽한 원형 행어를 빠르게 뒤져 예산에 맞는 옷을 찾아냈다.

각자 취향에 맞는 옷을 허겁지겁 찾아내고 계산을 마치고 허겁지겁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로 뛰어가는 내내 깔깔댔던 기억이 난다. 암홀이 갈비뼈까지 파인 레오파드 패턴의 핫핑크 면 소재 롱 원피스, 한국에 들고 와서도 잠옷으로 자주 입었다.

이상하게 잠옷만은 헤질 때까지 입는 나를 질려 하며 엄마가 그 낡은 옷을 이제 그만 버리자고 할 때까지, 버리지 않는 조건으로 더는 집에서는 입지 않는 것으로 합의하여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여행이라 호바트의 눈보라와 새벽 카페의 창밖으로 보았던 멋진 남자 정도를 제외하고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168시간의 여행 중 그 빈티지샵의 10분 남짓한 시간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외국에서의 첫 번째 빈티지샵 방문이다.


좋아하는 사진집 “우리의 삶이 춤이 된다면” 이 있다.

부제는 “일상을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의 기록들”로 일상의 공간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책으로 엮어냈다. 횡단보도, 술집, 도서관 등의 공간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을 보면 갑자기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시공간에 힘이 생긴다.


춤으로 일상을 깨울 만한 몸짓을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삶에도 그런 춤 같은 순간이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순간, 살아온 많은 시간 속에 흐릿한 기억들 사이에 유독 선명한 컬러로 남아있는 순간 말이다. 펭귄 아일랜드를 목표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계획에 없던 작은 이벤트가 십수 년 후 더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처럼.


그래서 빈티지 하면 나는 쌀쌀한 초겨울 멜버른의 공기와 옷을 고르던 다급한 손길, 그리고 깔깔대며 뛰던 길 위 다리에서 느껴지던 진동을 자연스레 떠올린다. 그리고 그 즐거웠던 기억은 항상 빈티지와 연상작용으로 떠오른다.


나는 빈티지와 첫 신고식을 행복하게 치른 행운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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