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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윤 Jan 10. 2024

위선자로 살아가려고요.

애도의 글

사회적 사건과 시사에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다. 직업 때문에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살고 있고 최대한 빠르게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직업적 특성상 장점으로 작용하지만.. 개인적으로, 보통은 피곤하다. 수많은 구설수도 피곤하고 내가 알고 싶지 않은 너무 많은 삶의 이야기들도 피곤할 때가 많다. 그래서 SNS도 하지 않는다. 정보 수집 차원에서 했던 SNS가 어느 순간 타인의 즐겁고 행복한 삶을 엿보는 창구가 되었고 이해할 수 없는 울적함과 무기력을 남겼을 때 지워버렸다.


그래서 최대한 쉴 때에는 뉴스를 보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한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간혹 어떤 사건들은 가슴에 슬픔을 남긴다. 이해할 수 없는 형식으로.




1. 살고자 하는 본능


작년에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느끼고 아는 존재>라는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은 인간의 마음과 의식이 어떻게 진화하게 되었는지, 의식의 본질을 생물학적 접근으로 풀어내고 있는 과학 서적이지만 한 사람의 독자로써 한 구절이 상상력을 펼치게 했었다.


책에 따르면 살아있는 유기체의 순수한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유기체의 생명의 목적은 '살아 있음'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목적이 가장 크기 때문에 '항상성의 명령'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직접적으로 중요하다는 것. 하물며 단세포 생물로 알려진 박테리아도 살기 위해 -비명시적, 비의식적이라 할지라도- '지능'을 가지고 있다. 즉, 살아남기 위해 그들도 '지능적'이라 볼 수 있는 어떤 선택을 한다는 이야기다. 즉각적이고 감각적이라 하더라도 위협이 되는 요소는 피하고 생명에 필요한 요소는 취한다. 단세포 수준에서도 살고자 하는 의도와 욕망이 이토록 선명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생명'에 살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은 어느 수준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살고자 하는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이고 욕구며, 태어난 순간부터 주어진 우리의 소명이며 목적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자연스러운 퇴화 과정이 아닌데도 죽고자하는 것은 얼마만큼 큰 역행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서러움과 슬픔과 고립감이 그 정도의 본능을 이기는 것일까 생각했다.


어린 시절 엄마가 그토록 갖고 싶던 장난감 하나만 사주지 않아도 얼마나 서러웠던가. 내 욕구와 욕망에 반하고 좌절한다는 것은 서럽고 슬픈 일이다. 세상 무너질 것처럼 울어대던 그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살고자 하는 본능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러니 생명은 건강한 신체에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이유일 터다. 생명을 유지하고 살고자 하는 본능에 맞는 것이다.





2. 그대여, 혼자 슬퍼하지 말아요.


예전에 어쩌다 보니 듣게 된 통화 내용이 있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고 공간이 조용해 지인의 휴대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이스피싱을 당한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보이스피싱 조직이 너무도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행동해 의심조차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큰돈을 잃었고 이것을 가족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목소리는 술에 취한 듯했고, 지인은 계속해서 그의 슬픔을 달래고 함께 있어줄지 물었다. 상대방은 괜찮다고 곧 들어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소식에 나는 2주 정도를 이유 없는 슬픔으로 보냈다. 그 이유는 그 통화에서 느껴지는 그의 슬픔이 아직 심장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느꼈을 고립감, 인생에 대한 회의, 사람에 대한 회의, 사랑하는 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함께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좁아진 시야와 그 좁아진 시야가 끊임없이 되풀이하게 만든 괴롭고 부정적인 생각들, 배와 가슴에서 끓어올라오는 괴로움을 알 것 같아 애도했다.


그 당시 나는 명상을 하고 있었고 간혹 페마초드론 선생님이 말한 통렌 명상을 연습하고 있었기에 -지금도 깊은 슬픔이 올라올 때마다 한다.- 그와 나의 슬픔을 모른 척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느꼈을, 그리고 내가 느꼈을 슬픔과 죄책감과 같은 괴로운 감정을 숨을 들이쉬며 생생히 느끼며 나의 가슴으로 녹이고, 그가, 그리고 내가, 그리고 이 세상에 그런 슬픔을 느끼고 있을 누군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볍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을 날숨에 내보낸다. 그런 호흡을 몇 차례 하자 위로가 되었다. 진심으로 그가 가는 길이 가볍고 따뜻하길 바란다. 내가 어느 순간에도 혼자가 아니듯이, 그도 혼자가 아님을 알기에.




3. 불완전한 선, 위선이라는 이름


언젠가 나를 끊임없이 말로 괴롭히던 상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매번 나보고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면접 볼 때도 그렇고 시키면 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막상 시키면 못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스스로 그런 적이 없음을 알았기에 화가 났지만 그는 끊임없이 그런 말을 했고, 어느 날은 내가 능력이 없다며 10살이 어린 신입에게 속닥이듯이, 그리고 나에게 들으란 듯이 비교했다. "야, 너는 그래도 저러진 않지 않았냐?" 나는 밥을 먹다가 밥이 턱 하고 가슴에 얹혀 그날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모욕을 주고 1분도 안되어 나에게 장난을 쳤다. 자신이 성격은 더럽지만 쿨하고 뒤끝이 없으며, 남들처럼 뒤에서 욕하지도 않지 않냐는 것이다. 솔직하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나에게 이런 말 저런 말 쏟아내던 그가 그것을 자랑같이 말하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위선을 떨어달라고. 위선적이라도 나에게 예의를 차려 달라고. 그렇듯 내가 알 필요도 없는, 일에서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나에게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욕망대로 지껄여 놓고 이제와 나는 그래도 위선자는 아니니 됐다니. 그 때문에 점차 침몰해 가는 나의 일상은 누가 책임져 주나. 이런 생각을 했다.


그 뒤로 나는 그런 사람들을 '쿨병 환자'라 부르고 피해 다녔다. 그리고 그때 위악보다는 위선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실천하며 살아가진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때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때로 좌절해 가면서도 결국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선함과 옳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반추하고 교정하면서. 하지만 위선이 싫어 위악을 선택할 때에는 반추와 교정의 과정을 없애버린다. 그래서 뻔뻔하고 당당하다. 그리고 솔직함은 그들에게 면죄권이 되어, 그가 하는 행동이 나에게 어떤 상처를 주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쿨병 환자는 불치병이다.




4. 어느 배우의 죽음 앞에서


나는 요사이 간간히 슬프다. 사실은 몇 주 내내. 그리고 미안하다. 어느 배우가 죽음을 선택한 이후부터 그렇다.


처음에 찌라시가 돌며 단톡방이 웅성거릴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의식조차 안 했다. 다들 쉽게 떠드는 이야기를 나도 했고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가 봐 라는 말을 나 또한 쉽게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것은 일이 진행되면서부터였다. 어느 시점에 오니 그가 아무것도 밝혀진 것 없이 죄인이 되고 그의 삶은 발가벗겨지고 산채로 난도질당하듯 사람들의 입으로 오르내렸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은 모두가 자신과 자신의 삶 이외에 진정한 관심도 없으면서. 그가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이며,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보호받길 바라는 사생활임을 알면서도.


이 모든 여파를 알았을, 그리고 그런 과정을 알기에 누구보다 조심했어야 했을 소위 전문가들이 아무렇지 않게 (고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렇게 만들었다. 확인 없이 흘리고, 확인 없이 쓰고 확산했다. 그리고 그것은 재생산되고 더 자극적인 말들로 포장되어 떠돌았다.


그의 마지막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 없는 슬픔이 올라왔다. 생명이 살고자 하는 세포에 각인된 본능을 역행할 때 어떤 마음일지 또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차 안에서 그가 느꼈을 고립감과 허망함, 슬픔, 서러움, 두려움이 나의 일만 같아 밤에 조용히 애도의 기도를 하며 울었다.


그리고 미안하다. 아무 의심도 없이 컴퓨터를 켜고, 사람들이 떠들고 언론이 떠드는 이야기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서 미안하다. 아무 의식도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녀 미안하다.


세상에 완벽하고 고귀한 선이란 있을까? 나는 그런 철학적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어떤 옳고 그름은 인간사가 만든 옳고 그름일 뿐 그것을 선이라 부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안다. 삶이란 온전하면서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후회하는 실수를 하고 때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때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살아간다. 누구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옳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삶이 그 옹골찬 고정관념을 깨어주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을 단면이 아닌 총체적이고 입체적으로 판단해 주기를 바란다. 몇 가지 예리하고 폭력적인 잣대로 삶이 단편적으로 재단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비록 오늘 하루 욕망에 지더라도, 비록 오늘 거짓을 저질렀더라도, 비록 오늘 잘못을 했더라도 나의 모든 삶이 실수이지도 않고 거짓이지도 않고 잘못이지 않음을 누군가 이해해 주길 바란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대체로 너의 삶은 좋았다고 평가해 주기를 바란다. 아마 그도 그렇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위선자일지도 모르겠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선을 향해 가야 하는.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는 위선자가 되겠노라 그의 발인 앞에서 기도해 본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지만 나는 당신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가슴속 깊이 그 배우가 가장 환하게 웃던 모습을 그리고, 또 그리며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가 가는 길이 편안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이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되기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를, 슬픔 속에서 고귀한 꽃이 피기를, 아픔이 승화되기를, 그래서 더없이 맑고 행복한 웃음을 띠는 날이 꼭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2024년, 한 사람의 슬픔은 온 우주가 느낀대요. 책에서 봤어요. 그러니 외롭지 않게 떠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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