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하루의 행복
동해로 여행을 왔다. 어쩌다 보니 하루 무료 숙박 기회가 생겨 떠나온 여행이었다. 어제는 꾸물하던 날씨가 이윽고 비바람을 불러왔다. 숙소로 가는 해안도로는 몰아치는 파도가 길 안쪽까지 잠입해 들어와 부서지며 장관을 이뤘다.
날은 흐린데 마음은 평온했다. 짝꿍은 음악을 들으면서 운전을 하고 나는 책을 읽었다. 운전을 하다 아무 데나 정차한 곳은 그림 같았다. 빗소리에 섞인 음악을 들으며 스티븐 킹의 <매혹적인 글쓰기>를 읽는다. 글쓰기에 대한 책인데 뭐 이렇게 흡입력 있지. 괜히 글쟁이가 아닌가 싶다.
비와 바람과 파도와 매혹적인 글쓰기라니. 참으로 뜬금없는 조화다. 하지만 좋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나는 좋아하는 책을 읽고 고개를 들면 푸른 바다가 있고. 비가 오는 게 뭐가 대수인가. 그냥 좋다.
해안 도로를 따라 무작정 차를 몰고 다니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저녁은 '회'였다. 역시 바닷가는 회다. 회 한 판을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동창회인지 산악회인지 모를 모임의 중장년 남녀가 모여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든다.
"야야야~ 건강이 최고여. 안 그랴? 우리 모두 건강하자!"
한 남자가 크게 소리치고 사람들은 제각기 '맞지', '암만', '아무렴 그렇지'하는 추임새를 넣는다. 구수한 사투리로 보아 충청도 사람인가 싶다. 아직 앳된 얼굴의 점원이 웃으면서 '시끄럽죠?' 하며 서비스라며 매운탕 라면 사리와 밥 한 공기를 준다. 통통한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번진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엽다.
오늘은 날씨가 개었다. 아직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지만 구름 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맑다. 오늘도 여행 패턴은 어제와 같았다. 발 길 닿는 대로 해안도로를 따라 여행을 하고 나는 간간히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가 좋은 풍경이 나오면 내려서 바다를 바라보고 차에 타면 다시 책을 읽고. 어제는 비, 바람, 파도, 매혹적인 글쓰기였다면 오늘은 햇살, 바람, 파도, 매혹적인 글쓰기의 하루다. 책도 재미있고 풍경도 좋고 동행인도 좋고. 천국이 따로 없다.
삼척에서부터 차를 몰고 북쪽으로 향하다 송정 해변에서 잠시 멈췄다. 화장실도 갈 겸 해서다. 송정해변가에는 작은 음악회 한창 진행 중이었다. 뽕짝이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당신밖에 없다는 가사의 구슬픈 가락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쿵짝쿵짝 신나는 리듬으로 바뀐다.
한 할머니가 앞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어제 비가 와서 쌀쌀한 날씨인데 반바지와 반팔 차림이다. 거기다 맨발이었다. 발놀림이 심상치 않다. 손놀림도 예사롭지 않다. 한 가닥 하시는 분이신가 보다. 한 풍류하시는 모양이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요지경 세상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넘어간다. 검붉은 하늘 아래 검은 산들이 즐비해 있고 우리는 터널을 달렸다.
잠시 읽던 책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좋은 책, 여행, 바람, 구름, 바다, 모래, 음악, 그리고 사람. 어제와 오늘 하루의 모든 게 잔상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렇게 하루의 마무리로 글을 써본다. 무엇을 전달해야 할지에 대한 주제는 없다. 다만 이상하고도 평화로운 하루를 친구에게 속삭이듯이 말해주고 싶었다.
내일도 모레도 오늘만 같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