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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정윤 Oct 21. 2024

할머니들의 귀여운 대화

장하다 세상의 모든 딸들아!

나에게는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거의 없다. 친할머니는 초등학교 저학년인지 유치원생 때인지 모를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다. 나에게 남아있는 추억이라고는 할머니가 아프셨다는 것뿐이다.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간혹 기침을 심하게 하셨다는 것과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것 정도다. (그날 친인척들, 동네 주민들 모두가 술과 음식을 먹고, 밤새 밝혀져 있는 전등이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할머니가 조금 무서웠는데 내 기억인지 엄마 기억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갱년기가 온 엄마는 날마다 밤이면 지나간 슬픈 추억을 곱씹었는데 그 이야기 속 할머니는 괴팍하고 무서웠었다.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래도 조금 남아 있는 편이다. 명절이 다 끝날 무렵 버스를 타고 가던 고불고불한 산길이라던지. 외갓집 근처에 있는 시장이라던지 할머니댁의 대문 같은 것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도착하면 할머니는 항상 “아이고~ 우리 강아지들 왔는가.”하며 우리를 반겼다.

 

어렸고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세상 모든 것이 무서웠었다. 가장 좋은 것은 엄마 품이었고, 엄마 품을 떠나면 다 두려웠다. 그래서 자주 못 보는 외할머니가 낯설고 무서웠다. 그래도 외할머니가 말해주는 ‘우리 강아지’라던가 ‘아가~’하는 말들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제 엄마가 나이가 들어 외할머니 나이가 되었고, 나는 그때의 엄마 나이 정도가 되었다. 엄마는 집에 놀러 오는 우리 조카들에게 그렇게 불러준다. 꼭 외할머니가 하던 것처럼. ‘내 강아지’, ‘아가’ 하며.


그리고 엄마는 나를 키울 때도 그랬다. 직장을 다니던 성인이 되어서도 전화를 하면 ‘아가~ 밥은 먹었는가~’ 하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없지만 할머니들이 조금 친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나를 보면 ‘아가~’라고 정겹고 따뜻하게 부를 것 같아서.


양평에는 할머니들이 많다. 아침 수영장에는 몸 관리에 철저한 할머니들이 그야말로 바글바글 하다. 다들 부지런들 하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수영을 하고 아들네며 딸네며 교회 일이며 할 일이 많다고 걸음을 재촉하며 떠나신다.


할머니들은 대개 ‘언니~’하며 서로를 부른다. 그들 사이에서 머리를 말리는 나는 대화를 항상 귀 기울여 듣는다. 대화들이 조금 귀엽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옛말 하나 틀린 거 없어. 잘 먹으면 죽을 때 힘들어.”


어떤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한다. 잘 먹으면 죽을 때 힘들다니? 그런 말도 있었나? 그 말이 틀린 것 같지도 않아서 속으로만 웃었다.


오늘은 할머니들 사이의 주제는 ‘면허 반납’이었다. 70살 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이제는 운전하기가 무섭다고 면허를 반납했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가끔은 서로 고구마며 밤이며 싸와서 운동 가방에 쏙 하고 넣어준다. ‘언니~ 이거 주말에 딴 밤인데, 너무 맛있어. 먹어’, ‘아니 무슨 밤이야? 아이고~ 참말로. 고맙기도 해라.’ 이런 대화도 오고 간다.


듣다 보면 주제도 다양하다. 날씨 이야기, 동네 장에 대한 이야기, 농사에 대한 이야기, 반려 동물에 대한 이야기까지. 원래 모두 아는 사이었는데 계모임처럼 단체로 수영장에 다니는 건지 여기 와서 친해졌는지 알 길이 없다.


도움의 손길도 거침이 없다. 어느 날은 수영복이 꼬여서 잘 못 입고 있으니까 어떤 손이 쑥 하고 들어오더니 착착 꼬인 어깨끈을 펴주기도 했다. 등에 로션을 발라달라는 분도 있었고.


불쑥 닿는 손과 내 경계 안으로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는 행동이 불쾌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메마른 손이 꼭 우리 엄마의 손 같아서 그리고 친딸 대하듯 허물없는 손길이 경계심을 놓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몇 없는 할머니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현실에서는 귀여운 할머니들의 대화를 듣는. 그리고 엄마가 보고 싶다. 딸이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세상의 모든 여자의 삶이 가슴으로 흘러들어왔다 나가는 것 같은 그런 하루였다.


장하다 세상의 모든 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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