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우연으로 가득 찬 도시, 파리를 아시나요?

- 초현실주의자들의 도시 그리고 그들의 마릴린 먼로에 대하여

by 김뭉치


인생은 암호문처럼 해독될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앙드레 브르통, 『나자』, 민음사, p115



수수께끼 같은 소설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좋아했던 건 그래서였다. 홈즈가 암호문을 해독할 때 나 역시 범인을 추리했다.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는 우리가 풀어야 할 암호문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이 소설은 브르통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인생의 비유일지도 모른다. 그가 115쪽에서 한 말처럼 “인생은 암호문처럼 해독될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브르통이 머물던 1929년의 파리는 신비로운 우연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삶이 늘 그렇듯 예측하지 못한 사건들이 늘 튀어나오는 파리에서 그는 나자를 만난다.



로맨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그대

나자는 독특했다.


그녀는 지나가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달리 머리를 높이 쳐들고 걷는 모습이었다. 너무나 가냘픈 몸매라서 마치 휘청거리며 걷는 듯했다. 얼굴에는 알아차릴 수 없는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금발에는 어울리지 않게 눈가를 아주 검게 칠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눈꺼풀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눈은 처음보았는데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 신비스럽고, 마치 자초지종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외모의 독특함 외에도 나자에게는 심미안이 있었다. 게다가 브르통을 그 자신보다 더 잘 이해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는 브르통의 시를 단번에 이해하고 그의 작품 인물에 동화되기까지 했다. 브르통은 감탄한다. 파악하기 어려운 나자의 그림들, 몽환적인 나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사로잡는다.


"내 숨결이 끝나는 것과 함께 시작하는 당신의 숨결."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신한테 난 아무것도 아니거나 하나의 흔적일 뿐이겠지요."
"사자의 발톱이 포도나무의 가슴을 조른다."
"검정색보다는 장밋빛이 더 좋긴 하지만, 어쨌거나 검정색과 장밋빛은 잘 어울리는 색이다."
"당신은 나의 주인이야. 나는 당신의 입술 끝에 붙어서 숨 쉬거나 죽어가는 미미한 존재일 뿐이지.
나는 눈물에 젖은 손가락으로 평온한 얼굴을 만져보고 싶은데."
"왜 조개탄이 가득 찬 어두운 구덩이 속에서 저울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일까?"
"자기 구두의 무게로 생각을 무겁게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흘린 눈물의 물결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애를 쓴 것이다."
"시간은 여유가 없게 굴어. 시간은 여유가 없다니까. 왜냐하면 모든 일이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야만 하니까.'


나자의 입에서 실타래처럼 뽑아져나오는 사랑의 밀어들, 빛나는 사유들이 브르통의 귓가에 감미롭게 감긴다. 브르통은 생각한다. 저 눈속에 스쳐가는 범상치 않은 빛은 무엇일까? 어떻게 저 눈 속에는 어두운 고통의 빛과 밝은 자부심의 빛이 동시에 비칠 수 있을까?”


나자는 모순된 존재다. 불과 물이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나자, 브르통과 약속하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 나타나는 나자, 어제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가 오늘은 정돈된 모습인 나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론 초연한 나자… 빠져들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은. 그렇게 브르통은 나자에게서 헤어나지만 평생에 걸쳐 나자에게 사로잡혀 살아가게 된다. 예언자의 모습을 한 나자가 정신병원에 감금된 이후로 계속, 그렇게 평생을.



나도 나를 모르는데

그렇다면 『나자』는 로맨스소설일까? 나는 이 소설이 로맨스의 외피를 쓴 자아 찾기, 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첫문장은 “‘나는 누구인가?’”다. 가히 최고의 첫문장 랭킹 1위인 『설국』을 뛰어넘을 만한 충격적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뒤를 잇는 문장들은 우리의 정수리를 도끼로 내려칠 정도다.


예외적으로 이번에만 격언을 끌어들여 말하자면, 사실상 이런 질문은 모두 왜 내가 어떤 영혼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아는 것으로 귀착되는 문제가 아닐까?


우리가 우리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가장 입체적인 방법은 ‘나는 이런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어떤 영혼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상 내가 누구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브르통은 나자를 만나기 전까지 이 소설의 3분의 1 가량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하는 데 쓰고 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초현실주의자들, 그가 산 책, 그의 생각들을 일기처럼 서술한다. 이때의 그는 실제적인 존재이며 현실의 브르통이다. 그리고 나자를 만난 이후부터 그는 그녀를 만난 뒤의 자기 모습을 마치 사진을 찍듯 소상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가까운 곳이나 구석진 곳에 있는 거미가 아니라 공중에 떠있는 거미줄에서 거미집에서,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우아한 사물 쪽으로 당신을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엮어”진다. 실제 그가 나자라는 여인을 만난 적이 있다는 데서도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는 소설이며 부분적으로는 에세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장르의 구분이 힘들고 경계가 흐릿하다. 반쯤 꿈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종종 꿈과 현실의 경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나자』는 마치 꿈과 현실의 중간에 위치한 듯 전위적이다.



초현실주의자들, 누구보다 현실적인

브르통은 실제 일어난 일들을 끊임없이 나열하며 그 속에서 어떤 인과관계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우연들은 현실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는 이 소설이 여닫이문처럼 읽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책에서 삶으로, 삶에서 책으로 이동하는 자유로운 소통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초현실주의의 대표작이라는 이 소설에서 오히려 현실이 더 선명하게 들어온다.


나는 모든 힘을 다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그 노예화를 증오하겠어요. 나는 이런 노예화의 형벌을 받고서도 대부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호의를 품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들도 강렬한 저항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감옥의 독방이나 사형 집행자 앞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다고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감내하는 순교자는 자유를 창조할 수 없어요. 자유란, 끊임없이 사슬로부터 해방되려는 열망이고, 그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지요. 사슬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려면, 지속적으로 가능하려면, 당신이 말한 선량한 사람들 중 대다수가 그렇듯이 우리 자신이 사슬에 짓눌려 있어서는 안 되지요. (중략) 나로서는 이 발걸음이 전부라는 것을 고백하고 싶어요. 그들이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질문이에요. 그들은 결국 어떤 길을 그려서 보여 줄 것이고, 그 길 위에서, 사슬에서 해방되거나 아니면 뒤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해방되도록 도울 방법이 나타나지 않을지 누가 알겠어요? 그렇다면 단지 약간 지체될 뿐이지, 뒤로 물러서는 건 아니니까, 그게 좋겠지요.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낮에 걸어 다니는 사람보다는 밤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가 일하는 시간은, 삶의 충만함을 갖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자가 그 자리에서 자신만이 가지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를 기대할 권리가 있는 사건, 아마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내가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맞닥뜨릴지 모르는 이 사건은, 꼭 노동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163쪽에서 브르통은 말한다. "누구나 자기의 현재 세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은 이 세계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하게 표현할 뿐“이라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깊은 영향을 받은 브르통은 무의식의 긍정적인 측면을 찾아내기 위해 파리의 이곳저곳을 헤맨다. 초현실주의의 대부인 그의 이런 행동은 오히려 현실에서 희망을 발견해내려는,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적극성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초현실주의란 무엇인가. 초현실주의는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랭보의 명제와 “세계를 개혁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종합하려는 시도였다. 그들의 실험은 전후 자본주의 파리에서 혁명과 변화에 대한 열망을 뜻했다. 인습적인 현실을 탈피하려는 듯한 브르통과 나자의 대화는 그래서 더 흥미롭게 읽힌다.



사진, 이상한 『나자』 월드의 가이드

『나자』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사진의 삽입이다. 비록 지금에 와서는 새롭게 느껴지진 않지만 『나자』가 1920년대 작품임을 감안할 때, 브르통의 이러한 시도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브르통은 1964년 출간된 『나자』의 개정판에서 원래 삽입되었던 몇 가지 사진들을 교체하면서 그에 대해 서문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는 반문학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모든 묘사를 삭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진매체를 삽입했으며 의사의 진단서와 같은 방식의 건조한 문체를 일부러 사용했다고 한다. 개정판에는 원래의 사진에 벡의 동상, 그레벵 박물관의 여성, 콩시에르주의 창문, 메종 루즈의 간판, 모르달의 그림, 레스토랑 ‘새벽(LES AUBES)’을 지시하는 간판에 대한 사진, 나자의 눈 사진이 첨가됐다. 또한 몇몇 기록사진들의 각도가 변경됐다.


이 이야기가 이끄는 여러 장소들을 나는 다시 보기 시작했다. 실상 나는 마치 몇몇 사람들과 대상들의 경우처럼 내가 스스로 생각했던 특별한 각도에서 잡은 사진 이미지를 이 장소에 부여하고 싶어졌다.


이 작품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각도, 즉 시선은 중요하며 이러한 문학적 콜라주는 다큐멘터리적 사진을 통해 현실의 이면을 보게 만드는 성취를 이룩한다.



수수께끼 같은 희망

"나자예요, 왜냐하면 나자는 러시아어로 '희망'이라는 말의 어원이기 때문이고, 또 단지 어원일 뿐이기 때문이죠."


브르통은 나자를 통해 일상에서 희망을 찾는다.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사랑을 통해 가장 잘 알 수 있다.



덧.

<르몽드>가 선정한 100권의 세계문학 중 하나이며 읽을 때보다 읽고 나서가 더 재미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의 발표 이후 나자는 초현실주의자들 사이에서 마릴린 먼로와 같은 존재가 되었으며 초현실주의 작품들이 연달아 창작되고 파리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산실이 되었다고 한다.


자, 이제 신비로운 우연으로 가득 찬 1920년대의 파리로 떠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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