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눕기의 효용
돌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상한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들어서는
담요 아래로 머리를 파묻고
두 무릎을 끌어당겼다.
나이는 마흔 살 가량, 하지만 이 순간엔 아니다.
있는-일곱 겹 살갗 너머 엄마 뱃속,
보호되는 어둠 속에 있는 동안.
내일은 전 은하계를 비행할 때의
인체의 항상성(恒常性)을 강의할 거지만,
일단은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 「귀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쉼보르스카의 시를 좋아한다. 그의 언어는 명징하고 단어들의 조합은 신선하다. 언어의 온도는 차갑지만 한 편의 시는 차라리 따뜻하다. 세계에 대한 연민과 슬픔, 애정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 시 「귀환」을 읽으며 자기만의 방에서 눕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눕기란 우리에게 '귀환'이다. 다른 곳으로 떠나 있던 사람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누웠다가 일어나는 일은 좀처럼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다. 일으켜서 어쩌면 지치도록 하루 종일 쏘다니다 행복한 기분으로 다시 눕는다. 설사 눕기 전의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더라도 눕는 행위 자체는 "일곱 겹 살갗 너머 엄마 뱃속"처럼 안정감 있다.
「귀환」의 마흔 살 가량 화자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나갔다 집에 막 돌아온 그. 세상 밖의 그에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걸까. 무슨 일들을 겪었기에 몹시 지친 안색일 수밖에 없을까. 그러나 그는 눕기를 긍정하는 사람이다.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몸을 웅크리고 누워 담요 아래 어둠 속에서 잠이 든다. "내일은 전 은하계를 비행할 때의 / 인체의 항상성(恒常性)을 강의할 거지만" 일단은 눕고 본다. 잊고 지냈던 "엄마 뱃속"에 있을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누우면, 점차 고단한 몸은 회복되고 마음은 잃었던 안정을 되찾는다.
일찍이 자기만의 방에 누워 있던 몇몇 여성들이 떠오른다. 먼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던 <디 아워스>의 로라. 호텔방에 누워 자살을 고민하던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녀의 삶은 남 보기엔 멀쩡하지만 그녀 내부의 소리는 다르다. 자상한 남편도, 사랑스러운 아이도 그녀를 만족시킬 순 없다. 배 속의 아기까지 죽일 수 없었던 그녀는 호텔방에 누워 있던 그날, 결심한다. 이 아기를 낳은 뒤엔 다른 인생을 살자고. 그녀에게 호텔방은 '자기만의 방'이었고 그 방에 누워 그녀는 생을 다시 정리한다.
호텔방에 누운 로라를 생각하니 마찬가지로 호텔방을 '자기만의 방'으로 정한 수잔 롤링스가 떠오른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에는 탄탄한 직장을 가진 남편의 아내로,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네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는 수잔 롤링스가 등장한다. 빅토리아풍의 우아한 저택에서 남 보기엔 행복한 가정을 이룬 채 살고 있는 수잔 롤링스. 그러나 무보수 가사노동의 부담은 수잔의 온 생을 짓누르고 급기야 수잔 자신의 삶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되기를 선택하게 만든다. 여러 개의 방과 넓은 거실도, 아름다운 부엌과 수목이 우거진 정원도 수잔을 치유할 순 없었다. 어렵게 가족의 합의를 얻어내어 저택 꼭대기층에 '엄마의 방'을 마련하지만, 그는 여전히 감금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수잔은 패딩튼 지역의 허름한 호텔을 찾아가고 19호실에 누워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나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결국 찾아낸 호텔의 19호실에서도 남편에게 발각되고 만 수잔은 또 다른 "엄마 뱃속"으로의 귀환을 감행한다. 수잔에게 있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자기만의 방'이 그만큼 중요했기에, 그 은밀한 방이 있어야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살한다. 수잔에게는 자기만의 방에서 눕는 것이 그만큼 절박한 일이었으므로 그의 자살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실존주의적 자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자기만의 방에 누워 자살을 생각한 사람이 또 있다. 『삶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 부슈만이다.
그러나 나는 죽기를 바랄 용기가 없었어. 나는 그저 누워서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아직까지도 그때 내가 느꼈던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어. 나는 아주 가벼웠어. 새털같이 가벼워졌어. 어쩌면 슈타인이 나에게 아편을 주었던 것인지도 몰라.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죽음의 시각처럼 보였어. 그러고는 점점 맑아졌고 낮이 왔을 때 나는 아직 살고 있었어. 생 가운데 다시 내던져졌어. 나는 몹시도 나 자신이 부끄러웠었어. 위대한 기회가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알았고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야. 그때 나는 울었어. 유리창에 기대서서. 창문은 열려 있었고 밝은 이른 아침이었어. 나는 슈타인이 서 있는 걸 보았어야 할 텐데 보지 못했어. 가을 낙엽의 냄새가 났고 나는 울었어. 몹시 슬픈 아침이었어. (중략) 나는 마치 귀신이 붙은 것 같이 열심히 배웠어. 죽음이 나를 가져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나는 생의 편으로 돌아섰던 거야.
니나는 자살을 선택했지만 살아나고 그렇게 누워 있던 어느 날, 자신이 할 일을 찾아낸다. 그건 바로 글을 쓰는 일이었다. 죽음이 자신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생의 편으로 돌아선다. 누워 있던 나날 동안 그녀는 스스로와 맞닥뜨렸던 것이다.
자기만의 방을 찾아 눕는 행위는 여성의 위치와 여성의 공간, 여성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일이며 이를 통해 삶의 균형을 이루는 일이다. 자기만의 방, 즉 돌아갈 곳, 기꺼이 쉼을 허락하는 장소를 가지지 못하면 그는 자신과 세계의 분리를 느끼게 되고 삶에 대한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 『장소와 장소상실』의 저자 에드워드 렐프에 따르면, 장소에 대한 깊은 애착은 다른 개인과의 밀접한 관계만큼이나 필수적이고 중요하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자기만의 방은 그 장소에 애착을 느끼는 여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고, 존재의 심원한 중심을 형성하게 된다. 로렌스 뷰얼 역시 개인의 생존에 기여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 개인의 정서나 욕망과 얽혀 있다고 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자기만의 방에 누워 진정한 '나의 삶'이란 무엇인지 곱씹어보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는 편일 수도, 살아가지 않는 편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 시대 여성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장소가 하나 있고 거기에서 우리가 두둥실, 부유하며 누워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만의 방에 누워 있는 여성들이 이토록 사랑 받는 이유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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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