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세 가지 관능은 꿈에 있다

- 4장 관능적 눕기

by 김뭉치

눕기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다. 앉아서, 또는 엎드려서도 꿈을 꿀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맞다. 하지만 누워서 꾸는 꿈은 앉거나 엎드려서 꾸는 꿈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일단 꿈의 러닝타임이 상당히 길다. 앉거나 엎드려서 잠을 잘 때는 누워서 잘 때보다 상대적으로 그 시간이 짧아서일 수도 있고 그 자세에서 잠을 자는 게 더 불편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한번에 적어도 세 가지~일곱 가지의 꿈을 꾼다. 기억하는 꿈의 가짓수가 이 정도니 어쩌면 더 많은 꿈을 꾸는지도 모르겠다.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은 잠을 깊이 못 자는 거라고들 한다. 도리스 레싱의 표현대로 세상엔 "꿈꾸는 사람과 꿈꾸지 않는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걸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양쪽 모두 상대를 경멸하거나, 간신히 참아주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꿈꾸는 사람의 경우, 수면의 질은 낮을지 몰라도 매일 밤 설레는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무의식 중의 나는 의식 중의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펼쳐 보이곤 한다. 꿈속에서 나는 공주를 지키는 기사가 되기도 하고 돌아가신 엄마를 만나기도 한다. 꿈의 세계는 놀랍다. 평일에 꿈에서 깨면 이건 소설감이라며 메모장에 꿈 이야기를 스치듯 적어놓기도 한다. 주말엔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어 잠에서 깨자마자 꿈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요즘은 꾸진 않지만 20대까지 반복해 꾸던 꿈도 있었다. 꽃비가 내리는 어느 숲속에서 쉬지 않고 뱅글뱅글 춤을 추는데, 복면을 쓴 남자가 나무 뒤에 숨어 나를 지켜보는 꿈이었다. 춤을 멈추면 그 남자가 내게 다가올 것 같아서 나는 멈추지 못한 채 계속 춤을 추었다. 대학 시절 동화 수업을 들었을 때 과제로 이 얘기를 썼더니 교수님께서 아주 좋아하셨다. 지나가는 꿈을 붙들고 글로 써 낸 것이 장하고 그 꿈이 아주 묘하다는 것이다. 기세를 몰아 소설 습작 시간에 이 꿈을 녹이기도 했다. 제임스 설터의 말대로 글을 쓰는 일은 학문이 아니기에, 예외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또는 삶에서 알아낸 것들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위대한 책에는 그 안에 실제 사람이 담겨 있"다는 그의 말을 위안 삼아.


한강 작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도 꿈에서 본 것들을 문장으로 옮겨 썼더니 시가 되었다고 한다. 꿈이란 시와 같다. 꿈은 삶의 장막을 걷어내고 그 뒤에 쌓인 비밀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꿈꾸는 시간이 기다려진다. 꿈은 내게 매력적이고 그만큼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엄마가 동해에서 처음으로 자살 시도를 하던 날 밤, 나는 서울에서 엄마 꿈을 꾸었다. 검은 말이 피를 철철 흘리는 꿈이었다. 미역처럼 젖은 머리칼이 얼굴에 들러붙은 엄마가 나를 찾아왔다. 엄마는 서울에서 세 시간 반 떨어진 곳에서부터 신발들을 그러모아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딛어서 내 집 현관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내가 무서워서 문을 열지 않자 엄마는 역시 조용히 기다렸다.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가 유난히 커서 나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엄마는 창백한 낯빛이었고 슬픈 표정이었다. 엄마는 이내 가지고 온 신발 전부를 내게 주고 떠났다. 그리고 나는 이름 모를 사막에 서 있었다. 꿈의 색채는 온통 누런빛이었다. 검은 말이 누워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 총이 심장을 관통한 듯 검은 말은 헐떡이고 있었다. 검은 말은 어쩐지 엄마 같았다. 엄마가 피를 철철 흘리는 것 같았다. 엄마일지도 모르는 검은 말이 간신히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나는 놀라 눈을 떴다.


다음 날 실제의 엄마는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약을 먹기 전, 엄마가 내 통장에 가지고 있던 돈들을 잔뜩 넣어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와중에도 엄마는 서울에서 혼자 사는 큰딸이 걱정되어 당신이 가진 전 재산을 나에게 보낸 것이다. 전날 꿈속에서 가지고 온 신발 전부를 내게 주고 떠났듯이.


이런 슬프고 우울하고 아름다운 꿈들을, 나는 많이 가지고 있다. 내 꿈의 세상은 생생하다. 어쩌면 낮에 보는 세상보다 누워 꿈속에서 만나는 세상에서 나는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설사 시간이 미끌미끌해지고 검은 모자에 검은 턱시도를 입고 검은 우산을 든 남자들이 떼지어 어두운 빗길을 걷는다 해도(실제로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그 꿈들을 마주한다. 꿈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의 글을 조금은 빛나게, 조금은 뾰족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꿈속으로의 여행은 내게 언제나 휴식인 동시에 생산적인 시간이다. 누워서 떠나는 여행이니 가장 돈이 들지 않는 여행이며 어디로 떠날지, 무슨 꿈을 꿀지는 나조차 알 수 없으니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모험이다.


때로는 꿈을 꾸고 싶어서 잠들기 직전 꿈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꾸고 싶은 꿈이 있을 때 그렇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잠들기 직전 엄마 사진을 보는 일이 잦았다. 혼란과 아픔과 긴장을 유지하며 그렇게 한번이라도 더 봐두면, 엄마가 내 꿈에 찾아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나는 잠귀가 밝은 편이라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도 내게 꿈을 만들어 준다. 나는 잡생각이 많은데, 꿈속의 상황에 집중하다 보면 현실의 불안은 이미 저 멀리로 사라진다. 이렇게 꿈은 실제의 문제도 해결해줄 만큼 큰 힘을 지녔다. 의식은 무의식과 마주함으로써 변화된다. 자신의 무의식을 마주해본 사람은 거대한 고통에서 치유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우울증에 걸려본 사람이 우울한 타인들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처럼 무의식과 악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무의식도 살필 수 있고 종국에는 그들까지 치유할 수 있다. 삼사三司, 영혼의 세 가지 관능이 꿈에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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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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