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화양영화 02화

남편 때리게 만든 영화 <롱샷>

by 김뭉치

약 10년 전 나의 동생님과 극장에서 나오던 때를 기억한다. 당시 동생님은 팝콘을 우걱우걱 씹으며 말했다. "일상이 이렇게나 힘든데 내가 영화까지 우울한 걸 봐야 해? 보고 웃을 수 있는 영화가 좋더라. 얼마나 해피해?"


평소 웃긴 영화만 좋아하는 건 아니었던 터라 동생의 말에 오래도록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격하게 그 말에 공감하게 된 일이 있다. 영화 <롱샷>을 보고 빵빵 터져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편을 수십 차례 때리고 난 직후다.


사실 요즘은 누구도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지 않는다. 그런 영화들이 제작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운 좋게 제작되어 개봉했다고 해도 관객이 많이 들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제아무리 <웜 바디스>를 만든 감독이더라도, 러블리한 코미디언 세스 로건이더라도, 멋지고 우아하고 아주 그냥 다 갖춘 언니 샤를리즈 테론이더라도 한 물 간 장르 로코를 부활시킬 수 있을까? <롱샷>을 보기 전의 나는 걱정이 많았고 내심 이들의 용기를 치하하며 별 기대 없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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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성을 살짝 비튼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롱샷>은 의외로 꿀잼 영화였다. <극한직업> 이후 이렇게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기존 로코 영화의 시점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변화시켰는데, 전형성을 살짝 비튼 것만으로도 엄청난 통쾌감을 안겨 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훈훈한 외모와 근육질 몸매, 큰 키에 완벽한 스펙, 그리고 거기에 더해 다정하면서도 츤츤한 양가적인 매력까지 갖춘 로코의 전형적인 남자 주인공 대신 여자 주인공이 그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여주가 샤를리즈 테론이 되는 것이다. 여신급 외모에 완벽한 몸매, 큰 키에 대선후보라는 완벽한 스펙, 그리고 거기에 더해 우아하면서도 남주 프레드(세스 로건)에 대해서는 한없이 다정하다. 이 언니, 백수인 프레드에게 직업을 구해주고 캐나다 수석과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며 밀당도 잘한다. 그에 비해 프레드는 전직 기자이긴 했지만 몸담았던 신문사가 메이저도 아니었고 편협함과 선입견으로 똘똘 뭉쳐 딱히 내세울 게 없는 남자다(기독교도, 흑인도 혐오하는 프레드를 통해 조나단 레빈 감독은 모든 혐오에 반대해야 함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여기에 양념으로 모든 남자들이 무덤에서도 잊지 못한다는 첫사랑 신화가 녹아 있다. 프레드의 첫사랑 옆집 누나가 하필이면 미국의 국무총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 누나가 프레드를 좋아하게 된다. 외모, 사회적 위치, 경제적 위치, 스펙 등 뭐 하나 잘난 게 없는 프레드와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한다. 유일하게 계산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샤를리즈 테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프레드이기 때문이다.


movie_image.jpg 프레드의 첫사랑 옆집 누나가 하필이면 미국의 국무총리라니!


이미 사회적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샬롯 필드(샤를리즈 테론)에게 남자가 가진 재산이나 명예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다만 프레드처럼 자기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본인을 이해해주고 맞춰줄 남자가 필요할 뿐이다. 매사 자신이 옳고 타협할 줄 모르는, 편협합으로 가득 차 있던 남주 프레드가 오로지 여주 샬롯 필드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던질 때,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상당하다. 지금까지 그 모든 역할은 로코 영화 속 여주 전담이었기 때문이다.


movie_image (1).jpg 기존 로코 영화의 전형성을 살짝 비튼 것만으로도 엄청난 통쾌감을 안겨 주었다


사랑에 있어 조건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마음일 것이다. <롱샷>은 사랑하는 누나의 연설을 보며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프레드의 순애보와 순박한 매력을 보여준다. 결국 이 유쾌한 판타지 로코는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상대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그 마음 하나만 있으면 다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보여준다. 이 마음 하나로 프레드 역시 (제목대로라면) '거의 승산 없던(롱샷long shot)' 샬롯 필드의 사랑을 쟁취하지 않았는가.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수상 배우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로코 장르에서도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는 샤를리즈 테론의 매력이 넘친다. 남자보다는 본인의 일을 택하는 현대 여성이 그녀 안에서 잘 살아난다. 영화번역가 황석희가 "굵직한 영화들을 제치고 제 개인적인 올해 1픽 기대작"이라고 했듯 안 본 사람은 있어도 보고 재미없다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현재 로튼토마토 지수 92%.



TIP. 로코에 가미된 뉴트로

<롱샷>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건 90년대 명곡의 힘이다. 보이즈투맨과 <It Must Have Been Love>는 영화 스토리 전개에 빼놓을 수 없는 기호로 사용된다. 특히 1992년 곡인 Roxette의 <It Must Have Been Love>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한동안 관객의 귓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2C5TjS2sh4


TIP. 영화 <롱샷>에 "와칸다 포에버"라는 대사는 왜 들어갔을까?

프레드의 흑인 친구 랜스가 결정적 순간에 외치는 "와칸다 포에버". MCU의 영화 <블랙 펜서>에서 유명한 이 대사는 요즘 할리우드에서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유행어로 쓰이고 있다.



TIP. 조연으로 등장하는 앤디 서키스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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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은 chouni.chaeg@gmail.com으로 메일 주시거나 070-7617-6949로 전화 또는 문자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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