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에 사람들은 크게 3가지를 걱정한다.
노후를 살아갈 수 있는 생활비 즉 돈 문제와 노후에도 스스로 걷고 움직일 수 있는 건강, 주변과 소통할 수 있는 인간관계가 그것이다.
나도 은퇴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당장 할 일이 없었다.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 바쁘게 출근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를 누리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했다. 내 기억은 시간마다 1교시, 2교시를 헤아렸고, 지금은 학교에서 무엇을 할 시간인데를 떠올리며 일과를 시작하고 마무리했다.
몸은 편안했지만, 마음은 은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 몸은 집에 있어도 생각은 학교 주변을 떠도는 유령처럼 배회했던 거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무조건 집을 나섰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삼월이라 아직은 다소 쌀쌀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데 나는 무조건 주변을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걷다가 도서관에 들어가 그림책을 읽었다. 그러다 또 걸었다. 집 주변 공원에는 사람들이 제법 걷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섞여 트랙을 돌고 주변 나뭇가지에 부는 바람을 느끼며 부서지는 햇빛을 만끽했다.
이렇게 햇살이 좋을 때 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학교에 있을 땐 야자 감독하느라고 해가 있을 때 퇴근한 적이 드물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해가 있을 때 퇴근하게 되었는데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해가 있을 때 퇴근하다니. 새삼 바람결에 풍겨오는 싱그러운 냄새를 맡으며 왈칵, 행복이란 게 별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살아있고 한낮의 햇볕을 느끼고 있고 내 몸으로 그걸 받아들이고 있는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서 온통 머리로만 복잡하게 계산하고 상상한다고 은퇴 후의 삶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머리가 아닌 몸이 움직여야 했고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든 새로운 시간표가 필요했다.
나는 체질적으로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걷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눕거나 앉아 있는 걸 즐긴다. 은퇴 후에 나의 건강을 걱정한 딸에 의해 강제적 운동을 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필라테스. 딸은 돈을 들여 3개 월권을 끊어주었고 일주일에 2번 가는 운동을 조목조목 체크했다. 개인 강습은 너무 비싼지라 3:1 레슨을 했는데 그것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했더니 수업을 마치고 올 때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얘기를 들은 딸이 그래도 운동이 되는 모양이라고 기뻐했다.
일주일에 2번이지만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에 금방 건강해질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꾸준히 운동을 다니면서 근육이 조금씩 강화되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어떤 운동을 좋아하는지, 어느 것이 나와 잘 맞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딸의 권유에 따라 1년 동안 필라테스를 다녔다.
1년이 지난 후 나는 필라테스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동안 들어가는 돈도 일반 헬스장에서 쓰는 것보다 많이 들지만, 그것보다 크게 운동을 했다는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운동을 하는 동안 힘이 든다. 하지만 몸이 표시 나게 좋아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동 자체의 재미가 적었다.
사람을 만나고 건강을 위해 운동하며 재미있게 사는 삶. 은퇴 후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일 수도 있다. 그런데 친구를 만나고 모임에 참석하고 하는 것도 어느 순간, 과부하가 올 때가 있다. 나는 주로 집에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가벼이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가족들은 너무 집에만 있으면 안 된다고 밖으로 나가 사람도 만나고 운동도 하고 뭔가 루틴이 있는 삶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수영이다. 물도 무서워하는 내가 수영이라니. 딸은 수영 개인 강습을 알아봐 주고 등록까지 해주었다. 8번 강습을 하고 물에 어느 정도 적응되자 동네 스포츠센터 수영강습에 등록했다. 일주일에 3번 가는 초급과정이었다. 처음엔 호흡도 힘들었다. 9월에 시작했는데 점차 날이 추워졌고 물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런데 일단 물에 들어가 레인을 왔다 갔다 하면 그런대로 견딜 만해서 눈이 펄펄 날리는 겨울에도 열심히 수영장을 드나들었다.
수영장에는 여러 유형의 회원들이 많다. 수영을 이십 년 이상 해온 사람도 부지기수고 같은 아파트에서 다니는 회원도 있었다. 같은 물에서 힘들게 발차기를 하며 헉헉대다 보면 묘한 동질감이 생기고 친근감도 생겨 동네 친구가 생겼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무조건 ‘언니’라고 부르는 호칭도 싫지 않았고 힘들게 운동하고 집으로 오다 먹는 햄버거며 김밥도 별미였다. 동네 친구가 생기니 굳이 모임에 나가지 않아도 외롭지 않았다.
은퇴 후에 동네 친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거 같다. 전에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매일 일상을 공유하는 친구가 가까이 있는 것이 더 든든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수영이 내게 맞았다. 전에는 운동하면 가기 싫어 꾀를 부렸지만, 수영은 시간 전에 스스로 가방을 챙기고 어쨌든 집을 나서게 되니 내 모습에 나도 놀랄 수밖에. 내가 가기 싫어도 수영 친구들이 가자고 성화를 해대고 물속에서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생각하곤 나도 수영가방을 챙기는 거다.
수영한 지 10개월이 되어간다. 4개의 영법을 다 배웠다. 잘 되는 것도 있고, 연습해도 제자리인 영법도 있다. 하지만 강사님의 말대로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 믿는다. 나이가 있으니 체력이 달려 젊은 나이에 시작하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월, 수, 금 외에 화, 목 자유 수영까지 일주일에 5번 수영을 하면서 의외로 나에게 잘 맞는 운동을 찾은 느낌이 들어 즐겁다. 운동하고 와서 책을 읽거나 걷기를 병행하며 요즘의 삶이 ‘괜찮다’라고 느낀다.
2025년 트렌드 키워드의 하나로 <아보하>가 보인다. 아보하는 ‘아주 보통의 하루’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전에 ‘소확행’이라는 트렌드에 심취해 나의 하루를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몰두해 집중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소확행은 확실한 행복이 되기 위해 크기가 커져야 했고 점차 남에게 보이는 과시로 변질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새롭게 등장한 ‘아보하’는 우리가 행복을 찾아 나서며 하루를 경쟁적으로 살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늘 보통의 하루를 살아내면 된다는 의미로 보기에 사람들에게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진다. 별다른 일이 없어도 하루를 잘 마무리하거나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과 성취에 감사하는 일조차 너무나 소중한 우리는 보통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균형 잡힌 삶이란 ‘아보하’의 삶이 아닌가 싶다.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냥 평범한 일상을 무리 없이 살아냈을 때 느껴지는 행복감, 그것이 바로 ‘아보하’의 의미가 아닌가 싶다. 은퇴 후의 하루하루를 ‘아보하’의 마음으로 살아가니 큰 욕심이 있을 리 없다. 봄날의 꽃향기에도 행복하고 동네 친구들과의 차 한잔에도 즐겁다. 내 힘으로 걷는 길의 바람이 싱그럽고 하루하루가 감사하다.
큰돈이 없어도 하루를 안온하고 평온하게 살았다는 느낌.
부대끼며 해야 할 일을 벽돌 깨기처럼 격파하며 살았던 지난 시간에 비해 소박하지만 평온한 하루를 보내는 요즘. 나는 ‘아보하’의 삶 속에서 균형과 행복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