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이란 단어는 요즘 그리 호응을 얻지 못한다. 바람이 빠진 타이어처럼 늘 있어 온 구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린 성실이란 단어는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최고의 급훈이자 교훈이었다.
사전에서 ‘성실’은 정성스럽고 참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곡식 따위가 다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도 가진다. 따라서 성실이란 어떤 일을 할 때 정성스럽고 참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요즘 이 단어는 늘 있는 새롭지 못한 내용으로 치부되고 있다. 누군가에게 성실하다고 얘기하면 융통성 없이 늘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성실’이란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단계에 이르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실’이야 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담임을 맡을 때, 이 단어를 급훈으로 내걸기도 했지만 한물간 가치라고 아이들은 말했다.
요즘, 누가 성실하게 살아가냐고.
성실이 밥 먹여주냐고.
빠르게 세상이 변화하는데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변함없음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기본적으로 삶의 베이스는 일관된 방향의 연속이라고 본다. 은퇴자에게도 이것은 적용된다. 은퇴하면 이전까지의 지리멸렬했던 삶이 사라지고 신천지가 눈앞에 전개되는 줄 알았다. 매일매일 새로운 일이 생기고 직장에 매여 살던 삶과는 다른 일이 팡팡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은퇴가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기에 기대가 많았다.
은퇴한 첫날, 팡팡 터지는 신천지는 없었다. 그날그날이 늘 똑같았고 오히려 시간이 남아돌아 예전보다 지루하고 무기력한 하루가 계속되었다. 전에는 한정된 시간 안에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하루는 길게 늘어져 있어서 뭔가 마음을 먹지 않으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시간이 넘쳐 흘렀다.
그래서 은퇴 초창기엔 여행을 많이 떠난다고 한다. 새로운 곳을 누비며 눈과 귀를 정비하고 하루의 지루함을 덜어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여행도 한때라고 한다. 늘 여행만 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은퇴 후 서너 달을 보내면서 나는 루틴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은퇴자의 시간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물론, 현직에 있는 것처럼 빡빡할 필요는 없다. 여유롭되 규칙적인 하루의 일과가 필요하다.
은퇴 초기의 나는 시간표가 있어야 함을 간과했다. 하루의 시작과 끝, 시간 대부분을 어떤 일을 하며 보낼 것인가 결정하는 것이 남은 내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점도 깨달았다.
친구는 6년 과정 한문 공부를 시작했다. <명심보감>을 시작으로 <통감 절요>를 거쳐 사서삼경을 공부하며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년 차가 되는 지금은 논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얘기를 나눌 때마다 늘어가는 그녀의 해박한 지식과 지혜에 눈을 크게 뜬다.
나는 그동안 읽지 못했던 러시아 문학에 몰입했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해 고골과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었다. 은퇴 전부터 읽던 영어 단편소설도 계속하였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청소년기에 읽어내지 못한 부분에 눈길이 가자 작품이 새롭게 해석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시고 성경 유튜브를 듣는다. 말씀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며 아침일기를 쓴다. 원래 저녁에 쓰던 일기를 아침으로 바꾸자 내가 오늘 하루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윤곽이 잡혔다. 일기를 마무리하고 작년부터 배우기 시작한 수영강습을 하러 간다.
우리 어머니가 몇 해 전에 집에서 넘어지신 뒤로 골절이 생겨 걷지 못하게 되셨는데 주변에 수영을 오래 하신 분들은 나이가 많아도 여전히 잘 걸어 다니시는 것을 보고 수영을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삼십 년 이상 수영을 하신 할머니들이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스스로 걷고 운동을 다니는 걸 보며 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숨쉬기 운동 외에는 하지 않던 내가, 수영장을 찾아가 등록을 하고 눈길을 걸어 겨울에도 찬물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하루에 8000보 이상을 꼭 걷는다. 운동이 삶의 질을 좌지우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수영을 다녀와 집안일을 하고 오후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러면 하루가 가고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어도 나의 일상은 변함없이 흐른다. 사이사이 친구도 만나고 외출도 하면 빠듯한 한 달을 살아가게 된다. 지루함이 스며들기 어려운 하루다.
수영하며 동네 친구도 사귀게 되었다. 수영장의 룰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무조건 언니라고 한다. 자매가 없는 나에게 언니라고 하는 동생들이 생기고 그들과 물속에서 끈끈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 수영 실력도 조금씩 늘고 운동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던 일을 친구들과 같이하며 전 같으면 차를 타고 갔을 거리를 요즘은 무조건 걸어 다닌다. 내가 생각해도 놀랄 변화다.
6개월 이상을 하루도 빼지 않고 8000보를 걸었다고 운동 앱이 알려준다. 나 같은 집순이가 은퇴하면 밖에 나가는 일도 없고 집에서 주로 보냈을 텐데 수영을 하게 되니 강습 외 시간에 자유 수영을 가느라 사람들과 만나 걷는다. 수영이 많이 늘지 않아도 괜찮다. 하루에 1센티만 앞으로 가도 일 년이면 365센티를 가는 것이다.
성실의 가치는 여기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최선을 다해 연습하는 사람은 노력만큼 발전이 있다. 거기다 꾸준함이 더해진다면 얼마나 큰 진보가 있겠는가.
은퇴 후의 삶은 보이지 않는 허공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조금씩 꾸준히 앞으로 나가야 길이 보인다.
빨리 가려고 달릴 필요도 없다. 나에게 있는 것은 그래도 시간이다. 이제 시간 부자인 나는, 그 시간을 규모 있게 쓰며 꾸준히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은퇴는 그런 면에서 축복인 셈이다.